'성령의 능력' 통해 성찬 안에 존재하시는 그리스도

[ 칼빈탄생5백주년 특집 ] 학술기고/ (24) 칼빈의 성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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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7월 15일(수) 14:13
   

중세교회의 예배와 성례전은 매우 정교하고 다양한 의식들로 가득 차 있었고, 웅장함과 더불어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유럽의 고딕의 성당들과 그곳에서 드려지던 중세의 장엄한 미사를 상상해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 개혁가들은 이러한 중세교회의 예배와 성례전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 미사 속에 숨겨진 이교적인 요소들과 비성서적, 비신학적인 내용들 때문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이 보기에 중세교회의 예배와 성례전은 은총의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었다.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유수(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라는 글에서 중세교회의 미사와 성례가 초대교회의 본래적 모습을 상당히 훼손하였고 이미 하나의 악습과 같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세교회의 성례전이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하여 루터는 미사를 그리스도의 희생의 반복으로 보고 있는 중세의 예배관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가 보기에 중세의 회중들은 미사와 성례를 통하여 치유와 연옥으로부터의 해방 및 다른 주술적인 결과들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은혜와 유익을 얻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다른 어떤 것(미사의 행위)으로부터 구원을 찾으려는 중세교회의 노력은 루터가 보기에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결국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었다.
 
루터가 중세교회의 희생제사와 인간의 공로주의에 대항하여 싸웠다면, 츠빙글리는 성례전의 행위 그 자체가 효력을 발생한다는 중세교회의 생각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가 보기에 "성례전을 거행하기만 하면, 그 자체로 효과가 발생한다"는 중세교회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율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예배와 성례를 주관하는 성직자들의 하수인이나 종으로 전락시키는 심각한 변질이었다. 따라서 츠빙글리는 성례는 하나의 기념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러한 성례전의 오용을 방지하기 위하여 성찬예식을 1년에 4회 정도로 축소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렇다면 칼뱅의 예배와 성례전관은 어떠할까? 초기의 종교개혁자들보다 20여 년쯤 후에 종교개혁을 이끈 칼뱅은 앞선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중세교회의 미사와 성례의 폐해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한걸음 더 나아가 루터나 츠빙글리가 주장하고자 했던 성례전 신학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문제들을 극복해 내려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루터는 희생제로서의 성찬을 반대하면서도 실제로 미사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실재로 현존한다는 화체설의 입장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었다. 그는 실제로 가톨릭의 화체설과 유사한 공재설을 주장하였는데, 이것들은 모두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육체가 실제로 성찬의 빵과 포도주에 어떤 방법으로 든 실재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츠빙글리는 이러한 생각에 반대하면서,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기억되고 기념되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 실재로 빵과 포도주에 현존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기념설 또는 상징설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에 대하여 칼뱅은 성찬에서 성물(빵과 포도주)이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로 실재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그렇다고 츠빙글리가 주장하는 것처럼 성찬이 단순한 기념이나 기억에 불과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칼뱅은 비록 미사에서 성물이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통해 변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성찬 안에 실제로 임재 한다는 독특한 이론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칼뱅은 그리스도의 임재을 빵과 포도주로만 국한시켜온 중세교회의 관점을 뛰어 넘어 그리스도의 임재를 보다 넓은 차원으로 끌어내는 공헌을 하였다. 동시에 칼뱅은 성찬이란 그저 기념에 불과하다는 츠빙글리의 생각에 대항하여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임재 하신다는 교회의 오랜 신념을 새로운 해석의 방법으로 지켜내고자 하였다. 이것이 바로 잘 알려진 칼뱅의 '영적 임재설'이다. 칼뱅은 그의 성찬론을 성령론과 연결시켜 성찬에서 그리스도 자신과 그리스도의 은혜가 실제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임재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종교 개혁가들의 상반된 주장을 하나로 묶어보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칼뱅의 포괄적인 입장은 성례전에 대한 그의 정의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성례란 우리의 신앙의 약함을 지탱시켜 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선의의 약속을 우리의 양심에 인치시는 외적인 표징이다. 그리고 우리 편에서는 우리가 주님과 그의 천사들의 면전과 사람들 앞에서 주님께 대한 우리의 경건을 인증하는 것"이라고 그의 성례전관을 정리하고 있다(기독교강요 IV xiv 1). 이러한 관점에서 칼뱅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여 유아세례를 인정하면서도, 성찬을 받는 자격에 대하여서는 인간의 믿음을 요구하며 철저한 규율을 적용할 것과 성찬의 배제를 실행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성례전에서 실제적인 하나님의 임재와 은총을 주장하는 객관주의적 성례전 주의자들과, 이를 무시하는 주관주의적 영성주의자들 사이에 서서(via media), 성례전 신학의 균형을 잡아보려는 칼뱅다운 시도였다고 볼 수 있겠다.
 
한편, 성례전의 실행과 관련하여서 칼뱅이 중요하게 개혁하려고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주술적이고 마술적인 성례전 예식이었다. 칼뱅은 말씀이 정확하게 선포되지 않는 알아들을 수 없는 중세의 성례전을 가리켜, "쓸데없고 무의미한 그림자", 혹은 "순수성을 상실한 것" 그리고 "미혹케 하는 표식"이라고 불렀다.  칼뱅은 말씀이 없는 성례전은 타당하지 않으며 효과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칼뱅에 의하면, 성례전에서 사용되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서 그들 안에 믿음을 낳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그리고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선명하고 명확한 음성이다. 그 말씀이 성례전과 함께 있을 때에만 성례전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례전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칼뱅은 성찬이 없이 말씀의 선포만으로 진행되는 말씀중심의 예배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평생 동안 표현해왔는데, 그렇다고 해서 성찬의 의미와 가치를 더욱 강조한 것은 아니지만, 칼뱅은 분명히 말씀과 성찬의 연합을 가장 이상적인 복음전파의 도구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선포된 말씀이 우리의 귀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전달되고, 그것을 통해 우리 안에 믿음이 생성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성례전을 통하여서 선포된 말씀의 호소와 능력을 보강하신다고 칼뱅은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성례전이 선포된 말씀을 다시 인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칼뱅은 예배를 드릴 때마다 매주일 성찬식이 거행되기를 원하였다. 물론 포도주를 주지 않던 중세교회의 관습(일종배찬)에 반대하여 빵과 포도주를 모두 줄 것(이종배찬)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칼뱅은 종종 주일예배를 말씀예전으로 줄였다고 비난받아 왔다. 그러나 이것은 칼뱅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칼뱅이 진정으로 원하였던 것은 말씀과 성례전이 함께 집례되며,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교인들의 교화를 이끌어 내는 예배였다. 비록 제네바 시의회의 결정으로 그의 희망은 아쉽게도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오늘과 같은 상징과 감성이 강조되는 포스트모던시대에 장로교회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만한 매우 중요한 귀띔이 아닐까 생각된다.

김 경 진
▲ 장신대 교수(예배와 설교)
▲ 장신대 신대원(M.Div.)
▲ 장신대 대학원(Th.M)
▲ 미국 보스톤대(T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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