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와 후세 목회

[ 디아스포라리포트 ] '호주 연합교회'편…<5>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7월 08일(수) 10:06

양명득/목사ㆍ호주연합교회 NSW주총회다문화목회부 총무

언젠가 시드니의 어느 교회 2세 모임의 예배를 정기적으로 인도한 적이 있다. 그런데 2세 리더 중 필자의 한국이름이 부르기 어려우니 영어 이름을 달라는 것이다. 격의없이 서로 이름을 부르며 교제하자는 명분이었지만 사실은 '맞먹자(?)'는 이야기였다. 필자는 너무 좋아 기쁜마음으로 생소한 영어 이름을 만들어 주었다. 호주에서 영어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면 취업시 면접에 초청될 확율이 낮다고 하는데도, 부모님이 주신 이름을 끝까지 고수해 왔던 그 자존심이 2세들의 요구에 무너진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편안해하는 이름으로 바꾼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2세들과의 문화코드였다. 아무리 유창한 영어로 그들과 의사소통을 하여도 필자가 가지고 있는 1세 한국문화와 그들의 젊은 호주문화 사이에 막힌 담이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고 몇 달후 필자는 그 예배인도를 다른 이에게 조용히 물려 주었다. 실패했다는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호주에서의 2세 목회는 아직 초기단계이지만 점차로 주목을 받으며 몇몇 큰 교회들이 영어예배와 2세 사역에 중점을 두고 있다. 가장 어려운 문제중의 하나가 2세들과 더불어 일할 수 있는 현지에서 훈련받은 사역자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까지는 주로 미국에서 활동하던 2세 사역자를 청빙하여 사역을 개발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 얼마 안가서 교회를 사임하거나 본국으로 돌아가는데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1세 지도와의 갈등, 교회의 지원 부족, 과다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호주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 등이 그 원인으로 드러나고 있다.

한번은 시드니의 한 한인교회가 2세 사역자를 청빙하러 미국의 한 목사님을 인터뷰하였다. 그 목사님은 뜻밖에 청바지를 입고 인터뷰 장소에 나타났다. 인터뷰 후에 2세들은 그 목사님의 생각과 비전을 좋게 여기어 청빙하려고 하였고, 1세 위원들 중에는 청바지를 포함한 그 목사님의 태도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그 목사님은 청빙되어 사역을 하게 되는데, 긴 시간 지나지 않아 결국 사임을 하고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1세들과 2세들의 엇갈린 기대와 문화가 결국 2세 목회자의 사역을 어렵게 한 경우이다.

디아스포라의 가장 큰 꿈중의 하나가 자녀들의 성공이다. 요셉과 다니엘 같은 그리고 에스더 같은 신앙의 후세들로 성장하여 한편으로는 현지에서 교육받아 거주하는 나라에 공헌하며,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며 부모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성공'말이다. 그리고 이런 꿈들을 이루는 우리의 후세들이 세계 곳곳에 얼마든지 많이 있다. 부모들의 기도와 자녀들의 노력이 있음은 물론이다.

호주에서의 세대관계는 복합적이지만 크게 네 가지 유형의 세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호주속의 한국인(Koreans in Australia)은 소위 '화분채 옮겨 놓은' 개척 1세 이민자들과, 노년에 자녀를 따라 이민 온 0.5세대들이다. 대부분의 이들은 지리적 환경만 호주일 뿐이지 한국인으로 한국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둘째로, 한국계 호주인(Korean-Australian)은 '화분이 깨져 호주 땅에 뿌리를 내리는' 모습으로 일부 1세나 1.5세, 그리고 2세까지 속하는데 이들은 한국과 호주를 연결하는 다리세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셋째로, 스스로를 호주인으로만 여기는 한국인(Australian Full Stop)도 있다. '호주땅에 씨가 뿌려져 싹이 튼' 한국적 유산을 잃어버린 많은 2세나, 의도적으로 한국 문화를 멀리하는 1세나 1.5세도 여기에 속할 수 있다. 네번째로 다문화 호주사회의 주변인('AustrAlien', Australia와 Alien의 합성어로 호주속의 이방인을 지칭함)으로 '어느 한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다니는 씨앗'이다. 이 그룹도 1세, 1.5세, 2세들 중에서 모두 나타나고 있는데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변두리인들이다.

디아스포라 목회는 이렇게 다양한 세대의 구원의 필요와 상처의 치유를 도울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세대간의 열린 대화와 배려가 필수적이다.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