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부흥ㆍ전도 패러다임 새로 찾아가는 신앙운동"

[ 특집 ] 7월 특집 3백만 성도운동의 역할, 신학적 의미를 생각한다

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7월 01일(수) 16:38

임희국/목사ㆍ장신대 교수


'예장 3백만 성도운동'은 21세기의 시대상황에 상응하는 교회 부흥과 전도의 패러다임을 새로이 찾아가는 신앙운동이다. 총회는 전도가 예수님의 지상명령(행 1:8)이므로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고 또 성령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일로 시작했다. 그러므로 3백만 성도운동은 교세확장을 위한 세 불리기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도하기가 매우 어려운 현실이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교회의 사회적 신뢰가 매우 낮다는 상황에 기인한다. 이런 점을 충분히 고려한다면 3백만 성도운동의 첫 걸음은 교회갱신일 것이다.

한국 교회 부흥의 역사, 성찰과 반성

교회갱신을 알아보기 전에, 한국교회가 부흥한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교회 부흥은 개신교 1백20년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신앙각성운동'으로 일어났다. 시대마다 사회정치적 위기가 있었는데, 위기상황은 오히려 부흥운동이 일어나는 환경으로 작용했다.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되어 1907년 평양에서 절정을 이룬 부흥운동이 제1세대의 신앙각성운동이었다. 이것은 사경회를 바탕으로 하여 성령의 역사 속에서 지은 죄를 회개하는 신앙운동이었다.

1920년대에 또 다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장로교회의 총회가 추진한 '진흥운동'이었다.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부흥강사들이(길선주 등) 부흥운동에 나섰고, 유년주일학교의 부흥이 크게 돋보였으며, 1920년에 시작된 청년면려회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청년들이 국제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경험하였다. 또한 농촌운동(1928-37년), 질병(한센씨병, 결핵) 퇴치운동, 절제운동(금주, 금연), 공창폐지운동 등 사회선교 및 사회봉사가 크게 두드러진 부흥운동이었다. 1950년에 6ㆍ25전쟁이 일어났고, 전화의 잿더미 속에서 부흥운동이 피어났다. 교회는 고달픈 삶과 절박한 상황에서 눈물과 한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배고프고 헐벗은 사람들을 먹이고 입혔으며 배움에 굶주린 피난민 청소년들에게 신앙교육과 학교교육('성경구락부' '고등공민학교' 등)을 시켰다. 전쟁경험은 우리에게 이중적이었다. 처절한 민족 비극의 역사 속에서 복음의 역사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하였다.

1960년대 이후에 한 번 더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 산업화시대에 대도시 중심으로 진행된 교회 부흥이었다. 흔히들 얘기하는 교회성장의 부흥이었다. 1972년에 장로교회의 총회가 부흥운동을 시작했는데, 1984년 무렵 이 운동이 가시적인 결실을 맺었다고 한다. 계속해서 총회는 '만사운동', '생명살리기10년운동', '백만인전도운동', '어린이ㆍ청소년전도운동'을 전개했다. 교회성장을 바탕으로, 한국 교회는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오대양 육대주 어디에서나, 험준한 오지에서나 외딴 섬에서도 이들 선교사들이 헌신적으로 사역했다.

한국 교회의 부흥을 얘기하면, 산업화시대의 교회성장을 선뜻 떠올린다. 교인 수 증가와 교회재정의 증대가 그 핵심인 물량적 성장이다. 당시의 교회성장은 경제 발전과 맞물려 있었고, 경제성장의 이데올로기가 교회 안으로 스며들어 왔으며, 적지 않은 교인들이 물질적 축복을 기원하는 기복신앙에 빨려들었고 이들에겐 하나님의 축복이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성공으로 이해되었다. 이러다보니 신앙범위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영역으로 좁혀들었고 신앙이 사적인 영역으로 국한되었으며 그것이 공공성을 띈 공적 영역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개 교회 중심의 교회성장이 주류였다.

성장이 아니라 갱신을 추구한 소수의 목회자들이 산업화의 그늘 아래 소외된 도시 빈민을 찾아가고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일했다. '도시산업 선교'와 '빈민 선교'운동이 일어났다. '작은 교회운동'이 일어났다. 산업화의 시대와 더불어 농촌사회는 빠르게 해체되었다. 농촌의 교인들이 도시로 대거 떠나갔기에, 도시의 팽창과 도시교회의 성장은 농촌과 농촌교회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졌다.
교회 부흥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

21세기, 지금의 세계는 마치 대지진처럼 커다란 변화  속에 있다. 이 변화는 1989년 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되면서 일어났다. 이 변화 속에서 문명의 전환도 일어나고 있다. 냉전시대(1945-89년)이후의 세계를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장악하였고 이에 빈익빈부익부의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영상시대, 디지털문명(인터넷 등)은 세계를 하나의 작은 촌으로 만들었고, 다양성 다문화 다원주의와 상대주의, 그리고 쌍방소통의 시대가 진행되고 있다. 환경오염과 생태계 위기는 하나님의 창조질서 회복을 통한 녹색문명을 기다리고 있다.

전세계 기독교의 상황도 빠른 속도로 변화되고 있다. 지난날에는 유럽과 북미가 기독교의 중심축이었는데, 이제는 그곳의 교회가 빠른 속도로 쇠퇴되고 있는 현실이다. 세계 기독교의 무게중심이 '북쪽에서 남쪽으로(아시아, 아프리카 등)' 옮겨갔다. 제도로서의 교회가 쇠퇴하는 동안에 교파색채가 희박한 대형교회들이 등장하였고 유사교회들도 새로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된 세계 기독교의 현실에서, 한국 교회는 그동안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흥하고 성장한 열매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세계 기독교와 더불어 '나누고 섬기는' 때가 되었다. 이 변화에 상응하여서, 이제는 교회부흥의 패러다임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산업화 시대의 교회성장 모델에 안주하지 말고 부흥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야 하겠다.

먼저, 신앙의 본질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교회갱신을 통한 본질회복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말씀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첫째, 누가복음 12장 16-21절,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이 말씀은 신앙의 본질회복에 해당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이 물신지배를 단호히 물리쳐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교회갱신이라고 본다. 오늘의 사회는 경제회생에 온통 커다란 관심이 쏠려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은 경제회생보다도 생명의 가치를 회복하는 일이 훨씬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본다. 지금이야 말로 맘몬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물신주의에서 해방되어야 할 때이다. 경제제일주의 가치관에 물든 상업주의문화를 생명존중의 문화로 바꿀 기회이다. 교회와 사회의 가치관을 바꿀 기회이다. 생명의 신앙을 회복하고자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간절히 기다린다. 성령은 생명의 영으로 역사하신다.

둘째, 누가복음 16장 19-31절, '부자와 거지의 소통'.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사회의 양극화를 지적하셨다. 소통의 부재를 뜻한다. 부자와 거지 사이의 단절과 인간소외를 지적하셨다. 부자란 자기중심적인 생활 방식과 이웃에 대한 무관심으로 저 혼자서 호화판을 즐기는 사람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함이 결국 사회의 양극화 현실을 낳게 된다는 점을 암시한다. 교회가 사회(특히 뒤쳐져 있는 사람들)와 소통하고자 노력하고, 사회의 다양한 계층들 사이에 소통이 있도록 교회가 기여하며, 세대 간 갈등과 지역 갈등을 해소하도록 헌신하는 일도 교회 갱신에 속한다.

셋째, 누가복음 15장 4-7, 8-10절, '잃은 양, 뒤쳐진 자를 찾아서'. 이 비유에서 지칭하신 '잃은 양'이나 '잃어버린 은전'은 남들 앞에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고 위축되어 뒤로 숨고자 하는 사람들의 총칭이라고 본다. 특별히, 오늘날의 '잃은 양' 속에는 무한경쟁 사회에서 '뒤처져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본다. 노인, 실업자, 환자, 장애인 등이다. 경제제일주의 가치관에 따라 능률과 효율성을 따지며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데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리하여서 사회에서 뒤쳐진 사람은 계속해서 뒤로 쳐지다가, 결국 잊혀진 사람이 되고 만다. '잃은 양'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말씀은 '잃어버렸으나 아직도 기억되고 있는 사람' 곧 '잃어버렸기에 잊혀 질 사람'을 찾아 나서라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말씀을 통해 뒤쳐진 사람을 배려하는 경건을 깨우칠 수 있다. '예장 3백만 성도운동'으로 전도할 사람은 바로 잃은 양과 같은 사람들이란 점을 깨닫는다.

예수님의 비유말씀에 따르면, 뒤쳐진 자를 배려하는 교회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상을 주신다. 잃은 양을 찾아낸 목자의 '즐거움'과 잃은 은전을 찾아낸 여인의 '즐거움'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즐거움은 잘 먹고 좋은 옷 입고 많이 쓰는 즐거움과 질적으로 다르다. 땅에서 찾는 즐거움이 아니라 위에서 선물로 내려오는 즐거움이다. 이것은 교회갱신의 즐거움이고 갱신하는 교회의 즐거움이다. '예장 3백만 성도운동'으로 새롭게 부흥하는 한국 교회는 '생명과 소통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한 신앙공동체로 상정한다. 산업화시대의 물량적 교회성장에서 벗어나서 21세기가 요청하는 영성이 충만한 건강한 교회이다.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