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험난했던 인생, 경이적인 저술 활동으로 승화

[ 칼빈탄생5백주년 특집 ] 학술기고 (22) 칼빈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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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7월 01일(수) 14:54
   
▲ 칼빈의 저작들. 칼빈은 바쁘고 힘들었던 55년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저작활동을 남겼다.

요한 칼빈(1509~1564)의 생애와 사역을 이해하는데 있어 '저술가 칼빈'은 절대적이다. 오늘 우리가 칼빈의 목회와 신학을 기념할 수 있는 것도 그가 집필한 책들이 우리에게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칼빈 전집 Calvini Opera'에는 칼빈의 저술을 성경주석, 기독교교리, 기독교(개신교)변증서, 교회와 교리 예전, 강해설교, 소논문들, 편지, 시 등 10개 분야로 편집하였다.
 
55세의 짧고도 험난한 생애를 고려할 때 칼빈의 저술활동은 경이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사학자 필립 샤프가 칼빈의 저술활동에 대해 "그 방대한 양과 중요성에 있어서 고대나 근대의 어떤 교회의 저술가도 미치지 못할 수준"이라고 한 것은 과장이 결코 아니다. 주목할 것은 칼빈이 끊임없는 사적, 공적 고난의 상황들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집필과 출간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칼빈의 저술 중 가장 기념할 만한 것은 다섯 번에 걸쳐 개정 보완된 '기독교 강요'와 수년에 걸쳐 집필된 성경주석서들이다.
 
그런데 칼빈의 강요와 성경주석서들은 동일한 목적에 따른 칼빈의 열정과 수고의 열매였다. 즉, 칼빈은 자신의 강요와 주석서들을 통해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더 잘 깨달아 바르고 분명한 신앙고백 위에 성도들을 세우며 하나님의 교회를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강요의 최종판 서문 및 주석서들의 '헌정사' 참조). 말하자면 칼빈은 자신의 '갑작스런 회심'을 경험한 이후(1532~3년경), 종교개혁 후발주자로서 교회의 개혁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신념에 따라 자신의 삶과 목회사역을 한 평생 동안 성실하게 수행하였던 것이다.
 
칼빈은 1540년 3월 나이 31세 때 자신의 첫 성경주석서인 로마서를 출간하였다. 이 당시는 칼빈이 제네바에서 추방 당해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물 때였다. 그는 이곳에서 7개월 전 자신의'기독교 강요' 제2판을 이미 출간하기도 했다. 그러나 1541년 9월 칼빈이 다시 제네바로 귀환되어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되면서 그는 제네바 교회를 중심으로 성경 강의와 더불어 성경 강해설교를 정기적으로 수행하였다.
 
제네바로 귀환한 이후 칼빈은 매년 1백70번 이상을 설교했으며, 23년간의 사역 동안 4천 번 이상을 설교했다. 이런 점에서 칼빈의 성경주석서와 강해설교는 분리될 수 없는 연관성을 갖고 있다. 칼빈에게 성경주석은 설교의 뿌리였으며, 성경강해는 설교의 열매였다. 1548년(39세)부터 사망하던 1564년(55세)까지 거의 매 년마다 성경주석서가 출간된 배경에는 그의 열정적인 성경 연구 및 강의가 있었다.
 
칼빈은 첫 주석인 로마서 주석에서부터 자신의 성경 주석 방법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석의 간결성과 명료성, 그리고 성경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간결성은 그 당시 신학자들의 글쓰기와 차별된 것으로 성도들이 성경을 용이하고 적합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은 글쓰기는 칼빈의 모든 주석서에서 나타나는데 불필요한 논의를 최대한 줄이면서 성경 본문에만 집중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
 
또한 칼빈은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따른 성경 원어에 따른 문법적 문맥과 역사적 배경을 매우 중시하여 납득할 만한 분석에 근거한 성경 해석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칼빈에게 성경 주석을 위한 가장 중요한 해석학적 전제는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권위와 성경을 해석하는 해석자에게 미치는 성령의 조명이었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성경 해석의 객관성을 중요시 하며 이에 따른 훈련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나, 해석자에 따른 성경 해석의 주관성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또한 하나님 말씀으로서 신구약 성경 통일성에 대한 인식 속에서 예언과 성취 내지 그리스도의 빛 아래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주석의 특징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한편 칼빈의 주석에는 교부들(예,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제롬, 암브로스)의 성경 해석이 긍정-부정적으로 자주 인용 및 소개되고 있다. 또한 종교개혁 선배들의 입장도 직간접적으로 소개되는데, 예를 들면 루터, 멜랑흐톤, 불링거, 부처가 있다.
 
실제로 칼빈은 이들의 성경 해석 방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칼빈은 이들(특히, 루터와 관련해서)과 다른 견해를 갖고 있을 경우, 주석서에서 이 사실을 스스럼없이 소개하면서 자신의 해석의 타당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의 성경 해석의 전통을 존중하되 성경 자체의 언어 문법적이고 역사 배경적 이해를 기초로 자신의 해석을 설득력 있게 독자적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칼빈은 성경의 가경이나 1세기 유대 문헌(예, 요셉푸스, 필로)도 틈틈히 활용하면서 성경을 주석하고 있다는 점도 관찰된다. 나아가 칼빈은 디도서 주석에서 밝히기를 고대 및 현대 이교도(비기독교인)의 저술을 인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미신적이라고 하면서 성경 주석가(설교자)들은 이 모든 것을 활용할 수 있으며, 이런 수단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하나님 말씀으로서 성경의 고유한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역사적 문서로서 성경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일반 학문과 상식의 가치와 필요성에 대해서도 분명히 인식하였다.
 
칼빈의 주석서들 가운데 아쉬운 점 하나를 언급한다면, 성경 메시지의 조화를 추구하는 가운데 성경 각 권(예, 구약의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 신약의 마태-마가-누가복음)의 독자적 위치와 메시지의 특징이 제대로 주석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55년의 생애를 살면서 고난과 외로움과 오해로 점철된 22년간의 분주한 목회 사역 속에서도 해마다 끊임없이 성경 주석서들을 집필하고 출간했던 그 사람. 자신이 성경을 연구하고 깨달은 바를 따라 그렇게 목회하면서 살기를 끝까지 힘썼던 그 사람. 그 사람 칼빈의 하나님 사랑, 성경 사랑, 교회 사랑의 열정과 희생이 조국의 장로교 목회자와 신학자인 우리로부터 더욱 새롭고 또 새로워지기를 소망해본다.

허주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  칼빈의 강요 및 주석서

 칼빈의 강요와 주석서들을 연대기적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536년 '기독교 강요 초판'
 1539년 '기독교 강요 개정 2판'
 1540년 로마서(신약성경의 첫 주석)
 1543년 '기독교 강요 개정 3판'
 1546년 고린도전후서
 1548년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이상, 한 권의 바울서신 주석으로 출간), 디모데전후서
 1549년 히브리서, 이사야서
 1550년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도서 '기독교 강요 개정 4판'
 1551년 공동서신, 베드로전후서, 유다서, 이사야서(구약성경의 첫 주석)
 1552년 사도행전 제1권(1-13장)
 1553년 요한복음, 창세기(재출간)
 1554년 사도행전 제2권(14-28장), 창세기
 1555년 공관복음서(마태-마가-누가복음; '복음서들의 조화'란 세 권의 이름으로 주석 출간)
 1556년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고린도전서(개정판)
 1557년 시편, 호세아서 강의집
 1559년 소선지서 강의집, 이사야서(개정판) '기독교 강요 개정 5판 최종판'
 1560년 사도행전(개정판)
 1561년 다니엘서 강의집, 시편(개정 불어판)
 1563년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이상, '율법의 조화'란 한 권의 이름으로 주석 출간),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아 애가서 강의집
 1564년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개정 불어판), 여호수아서(사후 출간), 에스겔서(1-20장) 강의집(사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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