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식혜

[ 목양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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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6월 17일(수) 09:19
김진동/목사 ㆍ 양포교회

시골목회에서 빠질 수 없는 재미가 심방시간이랄 수 있겠다. 대도시 생활과는 달리 농어촌의 생활은 끝없이 몸을 움직여야만 살아갈 수 있는 솔직한 노동의 대가를 거둘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생활 양식이 이러하다 보니 신앙생활에 집중하기 어려운 연로하신 노인 분들이 많기도 한 곳이다.

교회 출석률이 저조했던 연로하신 할머니 댁에 심방을 갔을 때이다. 반가우신 마음에 심방대원들에게 내 놓으실 요량으로, 밤새 만들어 두셨던 식혜를 넉넉한 마음으로 한 사발씩 국그릇에 내 놓으셨다. 예나 지금이나 시골 인심 넉넉한 것은 말해서 무엇하랴. 식혜사발을 집어 들자 먼저 식혜 맛을 보시던 심방대원들의 안색이 이상하다고 순간 느꼈다. 대원들이 바로 옆에서 손사래를 치며 먹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 모양인데, 문제는 식혜를 만드신 할머니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시고는, 노인네가 만들어 맛이 없냐며 서운해 하시는 눈치시다. 얼른 아무렇지도 않게 식혜를 쭉, 맛있게 들이키고는 아주 맛있다고 인사를 드렸더니, 한 사발을 더 퍼 오셨다. 감사하게도 이렇게 좋아하시니 돌아갈 때 담아주시겠다며 한 병을 더 갖고 오셨다. 주위의 경악스런 표정 속에서 다시금 한 그릇을 시원하게 마시고 나와, 다음 심방을 모두 취소시킨 채, 급하게 교회로 돌아온 나는 화장실 문도 채 닫지 못하고 한동안 먹었던 것들을 심하게 올려내고 말았다. 그리고 일주일 꼬박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금식을 하고 말았다.

심방을 다녀온 그 다음날 오전에 식혜를 대접해 주신 할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주는 식혜를 왜 다 먹었냐고, 또 준다고 그것을 또 미련하게 다 먹었느냐며 다그치시며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셨다. 그리고는 울먹이며 자신을 탓하셨다. 위로하는 나에게 할머니께서는 몇 번이고 미안해하시며, 싫은 내색 없이 식혜를 맛있게 먹어준데 대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시고는 전화를 끊으셨다.

사연인즉 혼자서 사시는 독거노인들은 시장가시는 일이 여의치가 않아, 저장이 용이한 식품들을 한꺼번에 대형으로 구입할 때가 많았다. 설탕도 예외는 아니어서 3kg짜리를 사서 쓰시곤 하셨는데, 공교롭게도 설탕과 조미료의 사이즈가 똑같고 디자인도 비슷하다 보니, 미각도 시각도 둔해지시는 연세에 설탕을 넣는다는 것이 조미료를 넣으신 것이다. 맛있게 해주고 싶어 넣어도 넣어도 좀처럼 달지가 않으니까, 아예 3kg을 쏟아 넣으셨고 이쯤이면 충분히 달 것이라 생각했던 할머니는 만족스럽게 내놓으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어찌나 멋진 분이신지 그 식혜로 인해 교회에 잘 나오시지 않던 그 분은 돌아가실 때까지 한 번의 결석도 없이 출석을 하셨다. 그것이 그 분의 미안함이 전해지는 가장 큰 답례였다 생각한다. 그리고 일주일 내내 아무것도 먹질 못했지만, 금식 아닌 금식이 되어 더 깊이 주님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내겐 더욱 감사한 시간이 주어졌던 것이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 장작을 패 주는 일, 한 동네 44세대에 연탄보일러를 직접 놔드리는 것도, 교인들 대신 멱살잡혀 끌려 다녔던 일도 내게 있어선 모두 목회생활이었다. 그야 말로 시골 목회는 새마을 지도자와 이장, 동네 심부름꾼으로 멀티 플레이어가 되지 않고서는 해내기 어려운 일인 것이다.

흔히들 목회는 어렵고 외로운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정녕 목회는 외롭고 힘든 일이 아니다. 굳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소명의식과 사명감을 얘기하지 않더라도, 인간적인 직업으로도 참으로 보람되고 의미 있는, 아름다운 기쁨과 감동을 가져다주는 직업이랄 수 있겠다. 목회야 말로 최상의 직업이며, 목회야 말로 삶의 최고점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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