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통일운동의 반성

[ 특집 ] 6월 특집 한국교회의 평화 통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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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6월 11일(목) 11:36

정성한/영남신대 교수

 

1. 한국교회 통일운동에 대한 평가

한국교회의 남북 통일운동에는 보수진영에서 주도하는 '북한선교'와 진보진영에서 주도하는 '기독교 통일운동'이라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이 양 흐름은 역사 속에서 때로 갈등을 빚었지만 오히려 더 많은 시기를 서로 협력해 왔다. 따라서 보다 보편적인 한국 교회사 서술을 위해서는 양 진영 모두 동등하게 역사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로부터의 민족이 해방되는, 곧 민족이 분단되었던 시점에서 시작된다. 북한공산정권을 피해 월남할 수밖에 없었던 북한지역 교회들은 실제 경험에 입각한 반공(反共)의식을 남한교회에 심어 주었고, 그 결과 '북한선교'는 한국교회 전체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후 한국교회사에서 반공의식은, 한국교회가 북한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하는 강한 동인이 된다.

다시 말하면, 보수진영의 북한선교는 북한에 대한 개인구원 차원의 끊임없는 관심을 한국교회에 불러 일으켜 왔다. 북한선교는 한국교회의 민족에 대한 가장 큰 그리스도적 사랑의 표현으로 인식되었고, 따라서 해방 이후의 한국교회사 속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온 남북통일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선교의 강한 동력이 되는 반공의식은 때로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사에서 비판에 직면한다. 첫째로 지나치게 정권에 의존하게 되어 한국교회의 주체성을 훼손한다는 점과, 둘째로 북한 공산정권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제한한다는 점이다. 이상의 북한선교에 대한 비판점을 문제의식으로 삼아 진보진영의 통일운동이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80년대 진보진영의 통일운동은 그 시작부터 반외세, 반정부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 이유는, 통일운동이 민족의 모순 구조를 극복하는 일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반공의식을 극복하는 일이 그 출발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보진영은 이 통일운동을 위해 세계교회협의회를 비롯한 미국과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 교회들과 적극적인 에큐메니칼 협력을 유지했다. 더욱이 1980년대는 한국사회가 민주화운동의 열기로 가득 찼던 때라 진보진영의 통일운동은 한국교회의 운동을 넘어서 한국사회의 통일운동을 이끌어가는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진보진영은, 민족분단 이후 1970년대까지 한국교회가 터부시 해왔던 반공의 극복을 신학의 큰 주제로 삼았고, 한반도의 평화가 세계 평화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세계교회에 각인시켰다.

그러나 진보진영의 통일운동과정에서 드러난 반외세, 반정부적 성격은 보수진영과의 관계를 매우 대립적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진보진영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하여 북한을 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정성에 의심을 받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에서 보수진영에게는 반공의식의 극복이, 진보진영에게는 신학적 우월의식의 극복이 필연적인 과제로 남는다.

2. 한국교회사에서 찾는 '통일신학'의 근거

첫째는 초기 한국교회 권서들과 조사들의 신앙이다. 의주 청년들로 시작된 권서들은 만주 땅에서 번역된 한글 쪽복음서를 들고 조선인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발품을 팔았다. 그들의 민족사랑은 이렇게 복음으로 시작되었다.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보고서를 보면 의주 출신 조사들이 부산, 평양, 원산에 있다. 남한지역 선교부가 개척될 때는 북한지역 선교부 소속의 조사들이 파견되어 초석을 놓는다. 한국교회의 첫 한국인 지도자들은 그렇게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을 사랑했고, 같은 겨레의 동포가 있는 곳이라면 한반도를 넘어 어디라도 갔다. 이들의 겨레 사랑이 한국교회 통일신학의 첫 번째 한국교회사적 근거가 된다. 한국교회의 겨레 사랑은 지리적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둘째는 순교자들의 신앙이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인 주기철목사는 신앙적인 이유로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이것이 애국애족의 행위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무자비하게 고문했던 일제 경찰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미치지 않을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손양원목사 역시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하였지만 일본인을 미워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자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아들로 삼았다. 그 이유로 한국교회는 손양원 목사에게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영광스런 이름을 붙여 주었다. 결국 그 역시 공산군의 손에 순교했지만 말이다. 우리는 주기철목사와 손양원목사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모든 인간을 품어 안는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십자가와 같은 큰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셋째는 보수와 진보의 협력이다. 1980년대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에서 보수진영과 진보진영 사이에 큰 대립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는 미래 지향적인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을 위해 의미 있는 두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첫 흐름은 1980년대 말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본교단 중심의 중도 노선이다. 이 노선은 기존의 전통적인 북한선교를 공동 기반으로 삼으면서,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의 극단적 대립을 지양하고, 양 진영의 장단점들을 상호 비판적이면서도 보완적으로 수렴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지켜가는 동시에 민족에 대한 책임을 충실히 수행해 갔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가장 극에 달했던 1980년대 말의 상황에서 본교단을 중심으로 중도노선이 형성된 것은, 보수와 진보가 서로 관계를 단절시키지 않고, 함께 통일운동을 수행해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다음은 1990년대 이후 형성된 한국교회의 북한 돕기 운동이다. 1990년대 들어 북한은 국내외적인 이유로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북한 돕기 운동은, 한국교회가 그간의 이념 지향적 성향의 통일운동을 배제하고 실천적 차원에서 추진한 '제3의 통일운동'이라고 여길만하다. 그러나 사실 이 북한 돕기 운동은 보수진영의 북한선교와 진보진영의 통일운동이 그동안 이루어 놓은 결과물들을 서로 공유한 결과다. 이같은 북한 돕기 운동에는 한국교회 모두가 그 신학적 성향을 떠나 적극 동참하였다. 이 운동을 통해 한국교회는 그동안 가장 극복하기 어려웠던 '반공'의 문제를 이론의 영역이 아닌 실천 영역에서 극복할 수 있었다.

3. 미래적인 평화통일운동을 위하여

첫째로, 한국교회의 신학(이론) 중심적 배타적 통일 운동을 반성한다. 미래 지향적인 통일운동을 위해서는 보수든 진보든 모든 신학의 결과들을 공유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이 서로 배타성을 극복하고 한국교회사 속에서 이루어 온 성과들을 각각 정당하게 평가해 주어야 한다. 그 점에 있어서 한국교회의 일치와 통일운동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둘째로, 한국교회의 통일신학은 계속 발전해야 한다. 본교단의 통일신학은 1991년 9월 제76회 총회에서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관한 본 총회의 입장'이라는 문서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18년이 지난 현재 민족의 상황은 많이 변했고, 한국 사회에 제기된 문제도 다양하다. 특히 1990년대 중반이후 급격히 늘어난 탈북주민 문제는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에서 보수와 진보 사이에 있었던 한 때의 노선 갈등을 재연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옛 소련 영토 곳곳에 흩어져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고려인들과 중국에 흩어져 있는 조선족 등 분단된 민족의 희생양들이 세계 도처에 있다. 더 나아가 이제 한국 사회는 이주 노동자나 이주 결혼여성의 증가로 우리가 단일 민족이라는 말이 더 이상 의미 없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러므로 통일신학은 탈북주민, 고려인, 조선족 등을 포함함과 동시에 혈통의 차원을 뛰어넘어 재정립될 필요가 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 실천적 나눔이 우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한국교회의 북한 돕기 운동이 보수와 진보를 연합시키고, 반공을 극복하게 했던 역사적 실례에 주목한다. 북한 돕기 운동은 실제로 남한 교회와 북한 교회가 한 밥상에 둘러앉는 밥상공동체의 실현이다. 이제 이 밥상에 북한의 주민들 뿐만 아니라 탈북한 주민들,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동포들, 이 땅에 어엿한 일원이 된 이주민들까지 초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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