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의 '차' 이야기

[ 목양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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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6월 11일(목) 11:33

김진동/목사 ㆍ 양포교회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절기를 만들어 때를 구분하였는데, 달을 중심으로 하는 음력보다는 한해의 농사를 짓는 일이, 해의 움직임에 따라 영향을 받기 때문에 농경국가였던 우리나라는 양력으로 절기를 정하였다한다. 한해 농사를 준비하는 시기인 청명과, 여름의 초입에 들어서는 입하, 그 사이에 곡물에 이로운 비를 내린다는 곡우가 있다. 항암 효과, 노화 예방, 식중독 억제, 환경 호르몬 배출 등 건강효과를 지닌 녹차는 생산되는 시기에 따라 명칭이 달라지는데 곡우 전까지 수확한 우전차가 최상급이며 그 이후에 딴 녹차는 세작, 중작, 대작으로 불린다. 경남 하동 녹차 시배지에서는 곡우 이전에 따는 어린 녹차 잎은, 참새의 혀를 닮았다고 해서 작설차라 하는데 그들은 '잭살'이라 표현한다.

실제 녹차란 표현은 바르지 못하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통칭하는 푸른 잎차들을 녹차라고 한다. 작설과는 달리 찻잎을 따서 증기로 찌거나 솥에 덖어 발효가 되지 않도록 한 불 발효차이다. 작설차 혹은 잭살차라고 불리는 차는, 일광과 그늘을 오가며 시들리고, 간질러 주는 일을 반복하다, 수많은 유념(비비기)을 통해 만들어지는 우리나라 옛 발효차이기에 녹차라기보다는 잭살, 혹은 작설차라고 해야 정확하지 않나 싶다.

차중에서도 5월 5일 단오에 따는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상태의 차를 최상의 차라고 친다. 쉬 마셔온 차들이 아기 다루듯 살살거리며 달래고 얼르는 작업은, 자연과 시간의 흐름을 파악하고 타협하며 이루어지는 땀의 결과이다. 그윽한 차향이 그렇게 생겨난다.

한 잔의 차가 주는 그윽한 향기나 맛을 위해서 이같이 수고하는 손길에서, 나는 주님의 마음을 배운다. 어떠한 일에서나 이러한 공들임이나 수고나 노력 없이 그저 주어지는 것이 있겠는가. 여리디 여린 잎들이 수없는 과정들을 통하여 다듬어지고 만들어지는 일들이 우리 사는 모습과 어찌 그리 닮았는지.

하나의 찻잎이 아니라 여러 수없는 찻잎들이 모여 어우러져서 내는 향기는, 그야말로 기가 막힌 그윽함과 영향력이 있다. 서로 자신의 향기만을 고집하거나 내세우지 않는다. 서로 어우러져서도 그리 강하지 않고, 독하지 않는 그윽한 향기로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상생이라 하고 화합이라 하는 시간은 늘 우리에게 필요로 하는 시간들이다. 그러면서도 차 향기보다도 못한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을, 우린 살아간다. 볕 아래 수고하는 거칠어진 농부의 주름진 얼굴을 잊은 채 말이다. 한 잔의 차속에는 색과 향과 맛이 어우러진다. 주님의 색깔과 주님의 향기와 주님의 맛스러운 사랑이야말로, 먼저 믿는 우리들의 배움과 실천의 몫일 것이다. 누구나 존재로서의 가치를 위해 큰 소리, 큰 몸짓을 내려한다. 그러나 먼저 믿는 우리들의 몫이야 말로 흐르는 물처럼 거스르지 않고 순리대로 흘러가야 한다.

작금에 여러 교회들이 사소한 분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문제로 야기되어 점점 지쳐가는 교우들의 모습을 많이 본다. 이들 중 신앙 전체를 송두리째 잠식당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가정이나 사업처에 어려움이 생긴 것보다 더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 이러한 곳에 차 한 잔의 연합이 어우러져서 목회자와 교우들이 합력하여 향과 편지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으면 한다. 

시국이 고요하지 않고 격동하고 있는 지금이다. 아마도 주님은 주름진 얼굴로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 가도록 안타까워하며 차밭의 어린잎들을 바라보고 계시지나 않을까 생각해본다.

한 잔의 차에서도 이렇듯 주님의 정성과 사랑과 수고와 시간의 공들임이 느껴지는데, 우리에게 향하신 주님의 공들임과 사랑에 우린 너무 둔감해져 있지나 않은지 되돌아보며 자숙하고 어우러져야 할 시간이 아닌지 생각해 본다. 상대를 바꾸려고 하면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의인 열 사람을 찾고 계심을 깨닫는 지혜가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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