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자와 증인의식(證人意識)

[ 논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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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6월 03일(수) 09:43

장영일/목사ㆍ장신대 총장 서리

성도에게 있어서 전도처럼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도는 인간의 생명과 관련된 일로서,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이 목숨이라고 주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서울 명동의 땅 한 평이 1억 원을 한다는데, 명동보다 몇 백배나 더 큰 한반도는 물론 지구촌을 포함한 수천억 개의 별들이 있는 우주를 다 준대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생명이며, 그 생명 가운데 내재하는 한 영혼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을 경우, 무한대의 영원한 생명 값으로의 가치전환이 가능하기에 전도는 소중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세상에 온 목적이 영혼구원 즉 전도임을 천명하셨으며, 그토록 참혹한 십자가를 지신 이유도, 그리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유언적 지상명령도 다름 아닌 '전도'였다. 이처럼 전도는 모든 성도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일생을 걸고 투자해야 할 인생목적이며,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본 교단에서 펼치고 있는 '3백만 성도운동'에 모든 교회가 후원하고 동참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은 성도들 가운데도 세상사에 분주한 나머지 이 지상명령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 심지어는 열심히 전도하는 동료를 비웃거나 전도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논의해야 할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 더 효과적인 전도인가 하는 것이다. 임박한 '파루시아(재림)'를 기다리며 결혼도 마다하고 전도에 '올인(all-in)' 했던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당부한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에 항상 힘쓰는(딤후4:2)것도 중요하고, 한국교회의 대표적 전도자 고 노삼헌 목사님이 외치셨던 "전도해서 받으면 좋고, 안 받으면 두 배 좋고, 뺨 맞으면 7배 좋다"는 구호도 소중하지만, 바울이 디도에게 준 "(너는)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딛2:15)는 권면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전도를 통하여 예수님과 복음이 존중을 받기도 하지만, 때때로 전도자의 누추한 언행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업신여김을 당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보다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주께서 전도자를 '증인'이라 부르셨다는 사실이다(행 1:8). 헬라어로 '증인(martus)'은 '순교자' 즉 복음을 위해 자기 생명까지 바치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전도자는 마귀에게 눌려있는 동료 인간들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생명까지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순교자적 사랑이 구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지존파처럼 강퍅한 살인강도의 마음도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 앞에서는 녹아질 수밖에 없는데, 오늘의 전도가 종종 하나의 형식으로 끝나는 이유는 전도자가 이와 같은 한 영혼에 대한 순교자적 사랑으로 다가가지 않기 때문이다.

순교자적 증인의식과 관련하여, 우리는 어떻게 사도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 성도들이 3백여 년의 짧은 기간 안에 로마제국을 복음화 할 수 있었던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도 바울의 경우, 그는 복음전도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바침으로써(행 20:24) 주께서 보여주신 인격의 최고 경지, 즉 겸손과 사랑의 최고 경지에 도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서 경험하는바 "내가 비로소 주님의 참 제자가 되었다"는 희열과 영광이 그로 하여금 더욱 전도에 매진하도록 유도했던 것으로 보인다(빌 2~3장). 이와 비슷한 동기에서 사도 요한도 첫째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영웅들로서 순교자들을 앞세우는 것을 보면(계 20:4~6), 초대교회 성도들의 놀라운 전도능력의 배후에는 순교자적 삶을 통해 전도자가 맛보게 되는 영적 기쁨과 종말론적 영광에 대한 소망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복음전도를 위하여 궁극적으로 예수 님외에는 그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기로 다짐할 때 주어지는 기쁨과 희열은 바울 같은 순교적 전도자에게만 허락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인데, 이와 같은 경지는 우선적으로 성령충만을 통해서만 가능하고(행 1:8), 이 성령충만은 기도와 회개에 전념할 때(행1:14, 2:38) 시작됨을 주목한다면, 전도와 관련된 오늘의 논의도 결국 (철저한 회개를 동반한) 기도의 필요성에 귀착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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