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여, 희망을 노래하자

[ 특집 ] 5월 특집 청년아 일어나 함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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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5월 29일(금) 11:05

홍성욱/목사ㆍ안양제일교회


하버드 대학의 교수였던 폴 케네디(Paul Kennedy) 교수는 '한국이 21세기 세계중심에 서게 될 다섯 가지 이유'라는 매우 흥미로운 글을 썼다.

첫째는 한국민족만의 '한'의 문화라는 것이다. 한국인의 고유한 문화적 정서는 '한'이다. 이는 다른 민족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이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전개되면 매우 파괴적일 수 있으나 긍정적인 면으로 발휘되면 무서운 집중력과 에너지의 근원이 된다.

둘째는 한국의 가족 중심 문화이다. 삼대가 모여 살며 끈끈한 정과 위계질서로 하나를 이루는 문화. 이것이 바탕이 되어서 공동체 단결성을 이루어 위기 앞에서 강력한 하나됨을 이루어낸다.

셋째는 선비정신이다. 선비는 굶을지언정 구걸하지 않는다. 강한 자존심과 불의 앞에 생명을 내걸고 맞서는 정의감이 어떤 역경 가운데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정신으로 공동체를 견인한다.

넷째는 무모성이다. 때로는 위험해 보이며 단점처럼 보이나, 위기상황이나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시점에 용감한 전진성으로 나타나 위기국면을 돌파하는 힘이 된다.

다섯째는 단일민족의 장점이다. 한민족은 하나의 혈통, 하나의 언어만 가진 단일민족이다. 이것은 하나의 정서와 정체성으로 묶여 일사불란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21세기의 무한경쟁의 시기에 종족과 언어로 분열되지 않고 민족이 하나 되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장점이다.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은 매우 암울한 상황이었다. 주변 강대국들의 핍박과 계속된 침략의 위험이 상존한데다 국가내 계층 간의 갈등은 매우 심각하였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그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이방종교와의 혼합주의적 성격으로 변질 되어 버렸다. 이러한 신앙적 해이와 이에 따른 도덕적 타락 등이 이사야로 하여금 조국에 대한 깊은 실망과 자괴감을 주었다. 선지자 이사야는 깊은 절망 중에 있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 위정자들, 백성들, 젊은이들 어느 곳을 보아도 절망뿐이었다. 이때 이사야에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임하였다.

이사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를 향하신 두 가지의 명령을 본다. 먼저는 일어나라는 것이다. 절망적 환경을 떨쳐 버리고 일어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소망으로 일어서는 사람들이다. 미문의 앉은뱅이가 금과 은이 아닌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섰듯이 우리는 일어서야 한다. 세상이 한숨과 절망의 탄식 가운데 있을 때 그리스도인은 부활신앙에 근거한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다. 사방이 가로막혀 있을지라도 하늘은 항상 열려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은 일어서는 사람이다. 다음으로 빛을 발하라는 것이다. 성경에서의 빛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에는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등불을 키게 하였고, 제사장들은 이 불이 꺼지지 않도록 기름을 공급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거룩한 제사장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불이 꺼지 않도록 기름을 공급하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셨다. 빛은 생명을 만든다. 세상의 식물은 빛이 있을 때만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오직 빛이 발할 때만이 생명이 살고 새로운 생명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빛은 어둠이 있으므로 존재하는 것이다. 어두울수록 빛은 더욱 더 그 존재가치가 빛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어둡고 혼란스럽다. 젊은이들의 세계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우리 부름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시대가 어두울수록 더욱 강한 빛을 발해야 한다.

그러면 누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가? 이사야가 받은 계시는 두 가지 자격을 말하고 있다. 그 첫째는, 빛을 받은 자이다. 우리 자신은 빛일 수 없다. 우리가 세상에 비추어야 할 빛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빛이다. 하나님만이 영원한 빛이시기 때문이다. 달이 태양의 빛을 받아 반사시킴으로 세상을 비추듯이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그 내면에 하나님의 빛을 받아야한다. 하나님의 빛이 비추일때 우리는 진정 밝아진다. 내속에 어두움과 악함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평화가 자리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지혜를 얻는다.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얕은꾀가 아닌 세상을 바꿀 깊은 지혜를 얻는다.

둘째는 여호와의 영광이 임한자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였다 함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음을 의미한다. 성령충만할 때 우리는 진정한 용기를 얻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모두 도망하였던 제자들이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죽음을 두려워 아니하고 길거리로 나아가 담대히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오직 성령충만한 자만이 세상에 나가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는 용기를 소유한다. 또한 세상을 변화 시킬자는 먼저 자신이 변화된 자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기 변화 또한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21세기는 혼란과 어두움에 쌓여있다. 희망을 잃은 사람들의 슬픈 탄식소리가 이곳 저곳에 넘쳐난다. 비단 경제적 어려움만이 아닌, 꿈을 상실한 사람들의 방황이 거리에 가득하다. 21세기는 비전의 사람을 찾고 있다. 오직 비전의 사람만이 어려움을 이기고 공동체에 소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비전이란 무엇인가? 영국의 신학자 존 스토트는(John Stott) 이것을 두 가지로 정의하였다. 첫째는 자신의 내면을 보는 시야이다. 어떤 일을 꿈꾸고 계획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선행 되어야 한다. 자신의 능력을 모르거나 과대평가한 상태에서 어떤 일을 이루려는 자는 지극히 어리석은 자이리라. 그러므로 꿈꾸는 자는 먼저 자신을 보는 자 이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세울 때 우리는 자신을 가장 정확히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나를 세우라. 나의 부족함과 허물과 무능이 보이리라. 그리고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길도 그 안에서 보게 될 것이다.

둘째는 앞을 보는 시야이다. 냉철하게 자신을 본 사람 또한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즉 시대의 변화를 예리하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시대가 어느쪽으로 전개 되는지, 무엇을 요구하는 지를 정확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높이 올라가야 한다. 높이 올라갈수록 멀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눈을 들어 보라"라고 말씀 하시지 않으셨던가? 그러므로 비전은 자기자신과 미래를 보는 능력이다. 결코 꿈이거나 계획이지 않다.

힘든 시기 일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등산중에 산에서 길을 잃을 때는 아래로 내려가기보다는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한다. 먼저 위로 올라가 내가 서있는 곳이 어느 지점인지를 보고, 어느 길로 가야 안전지대로 갈 수 있는지를 파악한 후 산을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길을 잃은 방황의 시기이다. 젊은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젊은이들의 자살소식이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그러나 열방과 민족은 하나님 빛으로 살리라. 청년들이여, 이제 일어나 희망을 노래하자. 하나님께로 받은 빛을 어둠을 향하여 비추자. 그리하여 방향을 잃고 헤매이며 혼돈 속에 있는 역사의 변혁자로 굳건히 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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