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청년이여, 신앙을 회복하라

[ 특집 ] 5월 특집 청년아 일어나 함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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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5월 05일(화) 17:03

황형택/목사ㆍ강북제일교회

통계청이 지난 4일 발표한 2009년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청소년의 사망률이 10만 명당 37.2명으로 전년 대비 1.4명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20~29세의 사망 원인 중 1위는 고의적 자해 또는 자살이 10만 명당 21명을 차지했다. 지난달에는 강원도에서 모두 4차례 동반자살이 발생하여 모두 12명이 세상을 등졌다. 이처럼 이 시대는 '절망이 유혹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절망의 손길이 너무도 강렬해 피해가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절망이 가득한 마음을 마종기시인은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나는 이제 살아 있는 꽃을 보면 가슴 아파진다. 며칠이면 시들어 떨어질 꽃의 눈매 그 눈매 깨끗하고 싱싱할수록 가슴 아파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아프다." 갑작스런 사고로 남동생을 잃은 슬픔과 절망에 그는 살아 있는 것을 보아도 이제는 가슴이 미어진다고 표현하고 있다. 견딜 수 없는 아픔이며, 살아 눈망울 싱싱한 채 위로의 말을 던지는 그 누구에게서도 위로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그가 '나무가 있는 풍경'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네 옆에 있다. 흐린 아침 미사 중에 들은 한 구절이... 울음 그치고 일어서는 내 백양나무 하나." 신앙인에게 진정한 위로는 다른 것에서 올 수 없다. 우리 곁에서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결코 위로를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위로를 다른 데서 구하지 말고 하나님께 위로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에 참된 위로가 쏟아지며 회복이 가능하다.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 자던 엘리야를 기억할 것이다. 승리의 산꼭대기에서 완전히 깊은 절망의 계곡까지 내려온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에 휩싸여 드러누워 버렸다.(열왕기상 19장 5~8절) 성경에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라는 표현은 그가 도망 와서 드러누워 버렸고, 완전히 포기했다는 의미이다. 모든 것을 중도에 포기해버린 상태를 "잠을 잤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엄청나게 하나님께 원망의 말을 늘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이럴 바에야 차라리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라고 그는 부르짖고 드러누웠다.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모든 것에서 떠나버리려고 작정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좌절의 순간에, 낙심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여겨지는 천사가 나타났다. 즉,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찾아오신 것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할 부분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의 엄청난 기적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그 놀라운 기적의 현장에 아예 엎드려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고 외치기까지 했다.

결국 위로자는 하나님 밖에 없으며 하나님만이 우리를 위로하실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에게서만 위로가 쏟아짐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에게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주신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라 직접적이고 실제적으로 필요한 것을 주시며 위로해주셨다는 의미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위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어루만져주시고 먹여 주셨음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봐' 위로하시고 회복시키셨기 때문이다. 엘리야에게 맡기신 사명, '여호와의 산 호렙'까지 그가 힘을 내어 갈 수 있도록 위로하시고 회복시키신 것을 의미한다. 절망하고 낙심하여 드러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위로를 얻어 회복해야 할 때다.

입체주의 회화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화가가 있다. 세기의 천재 파블로 피카소다. 피카소는 13세에 이미 더 이상 잘 그릴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묘사 능력을 자랑했다. 평생 무려 1만6천여 점에 달하는 회화 작품과 소묘, 그리고 우리는 그가 회화만 그린 줄 알지만 6백50점의 조각과 2천여 점의 판화를 제작한 탁월한 화가였다.

그렇게 탁월한 그에게도 화가의 정체성마저 위태로웠던 고통의 시기가 있었다. 청춘의 고통과 우울함, 복병처럼 찾아든 가난과 향수병, 미래의 불안으로 1901∼1904년까지의 캔버스를 온통 어두운 청색으로 물들인 시기였다. 영혼과 캔버스를 어둡고 우울해 보이는 청색으로만 염색했다. 피카소의 격렬했던 청춘은 '청색시기'였다. 그러나 피카소는 고통의 청색시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격렬했던 아픔으로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고통의 시기를 무사히 지나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의 세상이 장밋빛으로 변해 버렸다. 자신의 재능에 강한 자신감을 회복한 그의 캔버스는 따뜻한 분홍빛으로 물들여졌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우울한 청색시기를 지난 피카소의 따뜻한 '장밋빛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요즘 제 2의 IMF를 말하고 있다.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권에도 IMF, 아니 총체적인 난국이라 해야 할 정도로 위기를 맞고 있다. 사회 곳곳에 깊은 수렁이 패이기 시작했다. 겨우 한 수렁을 벗어나면 또 다른 거대한 늪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이 수렁을 언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만큼 첩첩산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에게 청색시기가 언제 지나가고 따뜻한 장밋빛 시대가 올 것인지, 그 기대를 접어버릴 만큼 어둡기만 하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소망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절망은 없다는 사실이다. 소망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절망 안에 가두어 두시는 분이 아니다. 사도 바울의 절절한 외침을 기억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강하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고, 가야 할 길을 가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는 첩첩산중에서 빠져나갈 길을 모르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배로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분명 더 확실한 장밋빛 시대가 우리 앞에 놓여 있음을 알아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절망의 시기에는 청년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그리고 청년들은 그분의 위로를 받고 위로 받은 후에는 회복하여 다시 일어나야 한다. 한국교회의 청년으로서 가야 할 길, 사명의 길을 걸어할 때다. 사십 주 사십 야를 쉬지 않고 달려가야 하며 그 여호와의 산 호렙에 이르기까지 청년들은 달려가야 한다. 그러면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그분만이 우리의 시대를 '장밋빛 시대'로 바꾸어 주실 것이다. 이런 은혜가 한국교회 청년들에게 흘러넘치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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