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을 하루같이

[ 목양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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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4월 29일(수) 15:01

고영환/목사 ㆍ금성교회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당시에는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경우들이 참 많이 있다. 이런 지혜를 얻은 우리 선조들은 큰 슬픔이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로 위로하곤 하였다. "세월이 약이니라." 그렇다. 세월이 약이다. 살다보면 슬픔도 고통도 엷어지고 점점 잊혀지기 마련이다. 오래 참고 견디다 보면 세월 속에 묻혀 지나가는 것이다. 어려움이 있는가? 견디기만 하라. 버티기만 하라. 그러면 이길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다. 그러나 견디지 못하면 쓰러진다. 참지 못하면 패배한다.

목회를 하다보면 변덕스런 날씨와 같이 어려운 시간들이 갑자기 목회현장에 찾아오기도 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누구를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환경을 탓하지 않아야 한다. 처지를 비관하지도 말아야 한다. 오직 시간을 창조하시고 시간을 이끌어 가시며 시간의 종말을 가져오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시편 기자는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원하신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를 도와주시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끝까지 견디며 주님의 손길에 의지하는 자에게 복이 있고 구원이 있다. 

시간에는 절대적 시간과 상대적 시간이 있다. 절대적 시간이란 정해진 운동 법칙에 따라 계속 앞으로 흘러가는 시간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만들어내며 나아가는 시간이다. 우리가 이런 시간에 얽매어 살면, 시간의 노예가 되어 질질 끌려가는 인생을 살게 된다. 이런 사람은 인생의 여유가 없다. 점점 비인간화되어 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초조해지고 심지어 두려움에 휩싸인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반면에 상대적 시간이란 사건으로서의 시간이요 사명으로서의 시간이요 의미로서의 시간이다. 우리는 상대적 시간을 사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내 일생을 통하여 꼭 이루고자 하는 일,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일에 대하여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집중하는 것은 상대적 시간을 사는 사람이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얻기 위하여 처음에 칠년을 머슴처럼 봉사했다. 종처럼 일하는 칠년이라는 세월이 절대적 시간 개념에서 보면 참으로 힘들고 고달픈 세월이지만,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는 까닭에 칠년을 며칠같이 여겼다(창 29:20). 야곱에게 있어 이 칠년의 세월은 상대적 시간, 즉 의미로서의 시간이었기에 긴 시간이 아니었다. 기쁨의 시간이요, 감동의 시간이었다. 그에게 칠년은 단지 며칠에 불과한 시간이었다. 베드로 사도 역시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벧후 3:8)"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했다. 더욱이 시편 기자는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이다(시 90:4)"라고 했다. 천년이란 절대적 시간도 주님에게는 하루나 한 순간 같은 상대적 시간에 불과하다. 

시간은 우리의 인생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는 절대적 시간 속에 있으면서도 시간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절대적 시간을 상대적 시간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이런 사람이 악한 세상에서 진정으로 세월을 아끼며 사는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 일생을 '하루같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야곱은 "칠년을 며칠같이" 살았다. 올해 우리 교회 표어도 "칠년을 며칠같이"이다. 우리 모두에게 앞으로의 칠년이 며칠같이 지나는 열정적 시간이요 집중하는 시간이요 감동과 감격, 행복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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