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4월27일~5월2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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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4월 23일(목) 10:02

월-깨진 유리창을 고쳐라
본문: 삼상 17:41-54
찬송가: 347장(통 382장)

'깨진 유리창 이론'이란 유리창처럼 사소한 것들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깨진 유리창을 보며 건물 주인이 건물을 포기했으며, 이곳은 무법천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집단이든, 어떤 사람이든 간에 '깨진 유리창'이 있기 마련이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도 '깨진 유리창'이 있었다. 바로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 정복에 실패한 것, 하나님의 현존과도 같은 언약궤를 빼앗겨 버린 실패감이 그것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골리앗에게 어떠한 반론도,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할 만큼 깊은 실패감과 절망에 빠져있었다.
 
반면 다윗의 깨진 유리창은 실패라기보다 전쟁경험이 없는 목동이라는 신분과 어린 나이였다. 그래서 다윗의 형들도, 사울왕도 골리앗도 다윗을 비웃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믿음, 온 땅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될 것이라는 믿음,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창과 칼에 있지 않는다는 믿음,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믿음을 갖고 나갔다.
 
당신의 깨진 유리창은 무엇인가? 세상은 깨진 유리창을 가진 당신을 비웃을지 모른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다. 그것이 실패든, 두려움이든, 상처든, 오해와 불신이든, 인정받지 못함과 보호받지 못함과 많은 직분과 육체적 피로 그 무엇이든 간에, 이제 그것과 상관없이 그것을 떨쳐내라.

오늘의 기도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오늘도 담대한 믿음을 주셔서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승리하게 하옵소서. 부족하고 연약한 나를 도우셔서 모든 상한 것과 약한 것을 이기게 하옵소서. 무엇보다도 주님만 더욱 의지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세상의 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믿음으로 서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 민 식 목사
광주동광교회 시무


 

화-아침마다 공의를 비추심
본문: 습 3:1-13
찬송가: 460장(통 515장)

세상이 아무리 추하고 불의해도 그 중에 계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스바냐 선지자 시대의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눈에 패역하고 더러운 곳이었다. 예언자나 제사장들조차도 부주의하고, 거룩한 성소를 더럽혔고 율법을 범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그 안에 계셨다.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공의를 나타내셨다. 이것이 바로 소망의 끈이다.
 
세상이 불의해도,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타락했다 할지라도 우리가 낙망치 아니하는 것은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공의를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소망으로, 인내하며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 신화에 바다 요정 이야기가 있다. 바다에 사는 요정들은 배가 지나갈 때마다 노래를 불러서 뱃사람들을 미혹했다. 신묘한 요정들의 노랫소리에 홀린 뱃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바다에 뛰어들고 말았다. 그런데 그 요정의 바다를 무사히 항해한 배가 하나 있었다. 요정들의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뱃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뱃노래를 불렀다. 요정들의 노랫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뱃사람들도 더욱 크게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우리가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거센 바다를 향해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거센 세파를 거슬러 살아온 사람들이다. 신앙인들은 요정의 노래에 귀를 막아 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더 크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다. 절망의 탄식 앞에서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역사와 소망은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온유한 입술로 주님의 의를 드러내는 남은 백성이 되게 하신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 절망의 탄식보다 희망의 노래를 더 크게 부르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 종 언 목사
황지교회 시무

 


 

수-마음의 눈을 고쳐주심
본문: 막 10:46-52
찬송가: 262장(통 196장)

오늘 말씀은 세상을 볼 수 없고 남의 도움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시각장애인 바디매오의 눈을 예수님께서 고치시는 내용이다. 바디매오는 그동안 살아왔던 서러움과 슬픔과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 속에서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애타게 간절하게 부르고 있다.

세상의 아름다움도 보지 못하고 또 남에게 구걸하며 남에게 무시당하면서 살아온 바디매오의 마음은 어떨까? 육신의 눈을 고침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고 나아가서 고침 받은 바디매오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바디매오의 믿음때문에 그는 육신의 눈뿐만 아니라 마음의 눈도 치료를 받아서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 오늘 우리 가정도 바디매오처럼 육신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하심을 감사드리자. 동시에 마음의 눈으로도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간절히 간구하자.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책과 영화를 보면 바이러스에 의해 눈이 안보였을 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오로지 본능에만 관심을 갖게 된다. 우리가 영혼의 눈을 뜨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계속 죄에 속한 본능대로, 세상의 기준대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지만 죄를 지닌 존재이다. 바디매오를 고쳐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마음의 눈을 치료해주신다. 부활신앙으로 우리 모두가 주님의 형상을 닮은 눈, 귀, 입, 그리고 몸과 마음이 회복되는 시간들이길 기대한다.

오늘의 기도

부활의 주님을 만난 우리가 영과 육, 마음의 눈을 떠서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사랑의 눈으로 가족을 섬기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생활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권 위 영 목사
서울숲교회 시무

 


 

목-전도하는 사명
본문: 막 16:15-16
찬송가: 496장(통 260장)

전주 서문교회에는 '이거두리(본명:이보한)'라는 전도왕이 있었다. 그는 찬송가 496장 후렴 가사인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를 큰 소리로 구성지게 부르며 전도하였다고 한다. 늘 그 찬송을 부르고 다녔기 때문에 '이거두리' 또는 '거두리 참봉'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한 쪽 눈이 실명된 지체 부자유자였으나, 그는 자신의 재산을 다 바쳐서 구제사업과 교회에 헌금하였다. 그의 곁에는 노숙자들이 늘 따라다녀서 '거지왕'이라는 칭호도 갖고 있었다.
 
그가 고을 원을 전도하였으나 고을 원은 핑계를 대고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하루는 남원까지 고을 원을 찾아가 교회에 가자고 하니 고을 원은 "눈이 와서 교회에 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그럴줄 알고 '이거두리'가 전주에서 남원까지 눈을 쓸고 왔습니다"라며 눈을 쓴 거리를 보여주자 그 원은 할 수없이 교회에 나왔다고 한다. 전도를 위하여 전력투구한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 안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부를 때, 그들의 청아한 찬송 소리는 어두운 감옥 안을 가득 채웠고, 죄수들의 영혼을 일깨웠다. 찬송소리가 감옥을 지나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퍼져 나가자, 지진이 일어나며 철통같이 굳게 닫혔던 감옥 문이 열리며, 바울과 실라의 발목을 잡고 있던 차꼬가 풀어졌다. 뿐만 아니라 간수의 가족이 주를 영접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우리 모두 찬송을 부르며, 3백만 성도운동에 동참하자.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소식이 기쁨의 찬송이 되고, 전도의 찬송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죽어가는 영혼을 일깨우는 간구의 찬송으로 널리 널리 퍼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어 춘 수 목사
꿈을주는교회 시무

 


 

금-화평하게 하는 자
본문: 마 5:9
찬송가: 294장(통 416장)

바울은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5)"고 경고하셨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갈등과 분열이 있다. 심지어 완벽해보인 초대교회에서조차도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갈등했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버리심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나의 머리가 되신다. 그러나 우리는 머리의 말을 듣지 않는 죄인으로 산다. 머리가 우리에게 하나가 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지키지 않고 있다.
 
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 바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교회가 화목하고, 가정이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화목하게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일 때,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노동시인 박노해는 '나쁜 사람'은 '나뿐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사람들과 화목하지 못하고, 화해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쁜, 나뿐인 사람'이 된다. 현대는 똑똑한 사람, 용감한 사람들보다 자신을 희생하며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이유는 예수님을 닮았기 때문이다.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불편함, 손해, 희생까지도 감수해야 한다. 신학자 브로더스는 "세상에서 화평하게 하는 일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고 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 그리고 가정이 되자.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상은 자기를 손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희로 하여금 화평하게 하는 삶을 살게 하시고, 저희로 인해 가정, 교회, 직장, 그리고 저희가 속한 모든 공동체가 평화롭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 재 필 목사
주향교회 시무


토-하나님의 평강으로 살라
본문: 빌 4:4-9
찬송가: 412장(통 469장)

우리는 지금 불안과 두려움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이때 어떻게 마음의 평강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바울은 하나님의 평강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있다.하나님의 평강이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 인간의 이해를 뛰어 넘은 초월적인 평안, 어떤 환경과 조건을 뛰어 넘어 심령 속에 주시는 평안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풍랑 이는 배 위에서 주무셨던 그런 평강이다.
 
그럼 어떻게 그런 평강을 얻을 수 있을까?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첫째, 기뻐해야 한다.

평강을 얻고 나서 기쁨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우선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주 안에서, 즉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 안에 있음을 믿으면 가능하다. 바울은 감옥에 있는 것이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다고 말하고 있다(빌1:12). 불행과 손해로 보이는 경우에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 것이다. 
 
둘째, 관용해야 한다.

관용이란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다. 이해하고 용서하며 인내하고 사랑으로 덮어주는 삶이다.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관용의 비결은 내가 하나님과 먼저 화평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은혜를 가질 때 이웃과의 관계도 좋을 수밖에 없다.
 
셋째, 기도해야 한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다. 삶의 환경을 통하여 시시각각으로 걱정과 두려움이 찾아온다. 그 때 그 순간 염려와 걱정을 기도로 바꾸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두려움의 시대를 사는 가운데서 우리가 참된 평안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뿐 입니다. 주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관용하며 기도할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강으로 임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양 익 모 목사
만민교회 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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