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개혁주의 신학 확립을 위한 삶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8> 박윤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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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4월 17일(금) 14:38
이상규 / 고신대 교수ㆍ역사신학

박윤선은 일생동안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을 위해 일관된 생애를 살았는데, 한국교회를 위한 그의 중요한 봉사는 성경주석 집필이었다. 그의 주석 집필은 1938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때로부터 40년간의 노고 끝에 1979년 신구약 66권의 주석을 완간했다. 그의 첫 주석은 1949년 3월에 출판된 '요한계시록' 주석이었고, 마지막 주석은 1979년에 출판된 '에스라, 느헤미아, 에스더주석'이었다. 그의 주석은 분량으로 보면 구약은 총 7천3백47쪽, 신약은 총 4천2백55쪽에 달해 신구약 주석은 총 1만1천6백2쪽에 달하며, 매년 약 2백40쪽의 주석을 집필한 셈이다.

그는 주석 외에도 '영생의 원천'(1970), '응답되는 기도'(1974), '주님을 따르자'(1975) 등의 설교집과, '성경신학'(1971), '헌법주석'(1983), 유고집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1989) 등을 남겼다. 단행본 외에도 고려신학교가 발행했던 '파숫군'에 2백18편, 총신대학의 '신학지남'에 40편, 합동신학교의 '신학정론'에 12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가 고려신학교에서 일한 기간은 14년인데, 2백18편의 글을 발표했으므로 매년 약 16편의 논문을 발표한 셈이다. 그가 고려신학교에서 일한 40대와 50대 초반의 기간은 그의 신학여정의 전성기였고, 가장 열정적인 '학구의 기간'이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지닌 학자이자,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가슴을 지닌 성경주석가였다.

박윤선은 조직신학자는 아니었으나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에도 박식하였고, 그의 성경주석에는 일본을 비롯한 동양권의 신학자와 하지(Hodge), 워필드(Warfield), 메이첸(Gresham Machen) 등 미국신학자들은 물론, 메이어(Jahn Meyer), 델리취(Delitzsch) 등 독일 신학자들과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바빙크(Herman Bavinck), 보스(G. Vos), 리델보스(Ridderbos), 끌라스 스킬더(K. Schilder) 등 화란의 신학자들의 신학을 동시에 소개하였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설명하고 이를 구체화하였을 뿐 만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 위에서 신정통주의나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고, 성경의 절대적 권위,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한 개혁주의 신학자였다. 그는 한편으로는 개혁주의가 아닌 신학을 비판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혁주의 신학을 천착하려고 힘썼다.

미국정통장로교 선교사였던 하비 콘(Harvie Conn)은 "박윤선은 근본주의 신학의 차원을 넘어서길 원했다고 함으로서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개혁주의 신학자였다"고 지적했다. 박 박사는 옛 평양신학교가 너무나 제한된 분야에만 집중한 나머지 일반은총의 여러 분야들을 인식하지 못한 교회가 세워질 것을 염려했다. 그는 단순한 근본주의의 차원을 넘어서길 원했다. 즉 한국교회가 칼빈주의라는 보다 원시적인 안목(the larger perspectives of Calvin)에서 바라보고, 또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길 원했다. 개혁신앙에서 동료였던 박형룡과는 달리 박윤선은 조직신학 연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신약연구를 통해서도 이런 목적을 이루고자 노력하였다. 말하자면 박윤선은 옛 평양신학교의 한계를 넘어서는 개혁주의 신학자였다.

그가 말한 칼빈주의에 대한 '원시적인 관점'이란 삶의 체계로서 칼빈주의, 곧 개혁주의적 세계관을 의미했다. 그가 고려신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1956년에 교단 명칭을 '고신측'이 아니라 '개혁파'로 변경하고자 했던 점은 그의 개혁주의 신학은 구 프린스톤신학과 웨스트민스트의 신학으로 이어지는 미국적 전통만이 아니라, 화란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의 개혁파의 전통을 수렴하고 이를 한국 교회 현실에서 석명하고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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