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의 학문의 여정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8> 박윤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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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4월 08일(수) 15:00

이상규교수(고신대, 역사신학)

평양신학교와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수학한 박윤선의 첫 신학논문은 바르트의 성경관에 대한 비평이었고 그의 두 번째 논문은 바르트의 계시관 비평이었는데, 이것은 반틸의 영향으로 보인다. 그의 글에 나타난 계시의존적 사색도 당시의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반틸적 대응이었다. 박윤선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1936) 귀국하여 평양신학교에서 원어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신학교육의 시작이었다. 그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두 번째 유학하던 중 제2차 대전이 발발하여 일시 일본에 체류하다가 만주 봉천으로 갔는데, 1940년 3월 이곳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또 봉천에 소재한 한인교회 교역자 양성기관인 만주신학원에서 박형룡과 함께 교수로 봉사했다.

해방과 함께 귀국한 박윤선은 1946년부터 1960년까지 14년간 부산에 위치한 고려신학교(현 고신대학교) 교수 혹은 교장으로 봉사했다. 그가 고려신학교 교수로 봉직하고 있던 1953년 10월에는 화란 자유대학으로 다시 유학을 떠났는데 이 때는 48세였다. 아내의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급거 귀국함으로서 화란에 체류한 기간은 불과 6개월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이 기간을 통해 화란의 개혁신학을 접하게 되고, 이 신학을 한국에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박윤선은 화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글을 섭렵하고 한국교회에 직접 소개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박형룡은 미국에 수용된 화란 신학을 소개했으나 박윤선은 독학으로 화란어를 공부하고 이 신학을 소개했다. 박윤선은 1935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유학시절 바빙크의 '교회교의학'(Gereformeerde Dogmatiek)을 접하고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에 심취하게 되어 독학으로 화란어를 해독하게 되었다고 한다.

박윤선이 박형룡(朴亨龍, 1897-1979)과 다른 한 가지는 이 점이다. 곧 박형룡은 미국의 구 프린스톤 신학(Old Princeton Theology)을 한국장로교회의 전통으로 확립하고 이를 보수하려는 입장이었으나, 박윤선은 화란에서 발전된 개혁주의 신학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는 점이다. 즉 그는 구 프린스톤 신학에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이어지는 미국 장로교 전통의 개혁주의 신학과, 특히 19세기 화란에서 발전된 개혁주의 신학, 이 두 흐름을 적절히 종합하였고, 이를 한국교회 현장에 이식하고 개화(開花)케 하였다는 점이다. 박형룡은 '정통주의' '보수주의' 혹은 '근본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하고 이를 혼용하였으나, 박윤선은 '개혁주의' 혹은 '개혁파'라는 용어를 선호하고 이를 빈번히 사용하였다. 박윤선이 고려신학교 교수로 봉직하고 있을 때인 1954년 9월에는 고려신학교 설립자인 한상동목사와 같이 미국 훼이스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6년부터 1960년까지 14년간 고려신학교에서 가르쳤던 박윤선은 1960년 고려신학교 교장 및 교수직을 사임하고, 1960년부터 63년까지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서 동산(東山)교회를 설립하고 목회자로 활동했다. 이 기간은 하나님의 말씀은 건조한 이론이 아니라 생명과 기쁨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는 기회였다고 술회했다. 1963년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 교수로 초빙 받은 그는 이 때부터 1980년까지 이 학교의 교수로 가르쳤다. 1979년에는 설립 50주년을 맞는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다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것은 그간의 그의 신학연구와 교육에 대한 인증이었다. 1980년 10월 말에는 총신대학 대학원장직을 사임하고 김명혁, 신복윤, 윤영탁 등과 합동신학교를 설립하여 원장 혹은 교수로 봉사하였고, 83세의 나이로 1988년 6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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