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목적으로 다스리라"

[ 칼빈탄생5백주년 특집 ] ⑫ 칼빈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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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4월 02일(목) 09:43

   

▲ 이은선
▲안양대 기독교문화학과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박사(Ph.D

칼빈은 루터와 츠빙글리에 이은 2세대 종교개혁자로서 제네바에서 평생 목회를 하면서 동시에 종교개혁을 진행하였다. 종교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대두되어 해결하기 가장 어려운 문제들 가운데 하나가 종교개혁을 뒷받침해 줄 정치적 후원세력을 확보하는 것과 동시에 그러한 정치적 후원세력과 교회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느냐?는 문제였다.

당시에 로마 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를 비롯한 유럽의 모든 나라의 정치지도자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새롭게 태동하고 있던 종교개혁운동을 무력을 사용하여 탄압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을 추진하던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많은 박해를 만났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화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어려운 정치적 박해의 상황 아래서 종교개혁을 추진해야 했던 종교지도자들은 정치권력과의 관계에 대해 로마 교회와는 다른 이해를 제공해야만 했다.

로마 교회는 세속 권력까지 장악하여 모든 성도들의 삶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러한 로마 교회에 반기를 들고 개혁을 추진했던 루터는 1524년과 25년에 농민전쟁을 겪은 후에 영주들이 통치하는 국가 권력의 후원을 받는 국가교회 형태를 지지하게 되었다. 루터는 기본적으로 로마 교회에 반대하여 교회와 국가가 상호 구분된 역할을 하는 두 왕국론을 주장하였으나, 나중에는 국가의 보호를 받는 국가교회의 형태가 되었다.

자유도시인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을 했던 츠빙글리는 시의회의 후원을 받으면서 종교개혁을 추진하였다. 츠빙글리는 교회와 국가를 두 왕국으로 구분하는 것을 반대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실현하는 두 기관으로서의 밀접한 연관성을 강조하였다. 츠빙글리는 교회와 국가와의 밀접한 관계에서 교회의 치리는 시의회에게 넘겨주었다. 반면에 츠빙글리의 개혁에 반대하고 나왔던 재세례파들은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재세례파들은 국가가 하나님이 세운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나 기독교인들이 국가의 공무원이 되거나 군대에 가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주장들이 대립하고 있던 상황에서 종교개혁을 추진했던 칼빈은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서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던 로마 교회의 입장을 분명하게 거부하였다. 동시에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던 재세례파의 입장도 기독교인들도 관리로 봉사할 수 있다는 성경의 견해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아 거부하였다. 칼빈은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대하여 루터의 입장을 취하여 두 왕국론을 수용하였다. 칼빈은 영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있는 교회와 세속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있는 국가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구분된다고 보았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범죄한 후에 인간 사회에 생명을 보호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국민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세운 것이 국가이므로 국가는 교회와 구분되는 고유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국가는 교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단과 우상숭배를 방지하는 소극적인 역할을 가지고 있다. 칼빈은 초기에는 국가에 대하여 이러한 소극적인 역할만을 인정하였으나 나중에 제네바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집권한 후에는 국가에 대해 교회와 종교의 발전에 기여하는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 당시에 칼빈이 생각하던 국가는 오늘날과 같이 세속화된 국가가 아니라 당연히 기독교인들이 통치하는 기독교 국가였으므로 그에게서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구분된 역할을 가지고 있지만 상호 연관되어 일할 것을 기대하였다.

칼빈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하여 루터와 같이 교회와 국가를 구분하지만 루터보다는 좀 더 밀접한 역할을 인정하였다. 루터는 교회와 국가를 구분하여 초기에는 상호 간섭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였으나 국가교회 후에는 국가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칼빈은 양자를 구분하면서도 국가가 교회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기대하였다. 반면에 교회와 국가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던 츠빙글리보다는 양자의 구분을 좀 더 명확하게 하였다.

칼빈의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서 더욱 독특한 점은 국가로부터 교회의 독립적인 치리권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진행하면서 치리 문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제시하지 않았고, 국가교회가 된 후에는 치리의 문제는 영주의 권한에 속하였다. 반면에 츠빙글리는 치리의 권한을 시의회에 맡겨서 교회의 독자적인 치리권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재세례파들은 국가와 완전히 분리되어 치리에 관한 모든 문제를 개교회에서 처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칼빈은 국가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종교개혁을 추구하면서도 교회의 독립된 치리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칼빈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화를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지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성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칼빈은 공예배를 통한 은혜의 수단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말씀선포, 기도와 찬양, 성례의 시행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성도들의 삶이 성화되어가는 것과 함께 보조적인 수단으로 그는 교회의 권징을 중시하였다. 그는 이러한 권징을 통해 성도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잘못된 신앙을 바로잡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물드는 것을 방지하고 교회 전체가 거룩해지기를 원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은 국가의 권력과 구분된 교회의 권징을 시행할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노력하였고, 바로 이러한 기구로서 당회(con-sistory)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물론 칼빈 당시의 컨시스토리를 오늘날의 당회와는 약간 성격이 다르지만, 목사들과 장로들이 모여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올바르게 이루어지도록 권면하고 권징하였다.

칼빈은 국가에 대해서는 백성과 법과 관리의 세 가지 구성요소가 있다고 보았다. 백성들은 국가의 관리들에 대하여 공경하고 순종해야 하나,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것을 명령할 때에는 불순종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당시 가톨릭을 믿는 군주들이 개신교도들에게 미사를 드리도록 강요할 때 칼빈은 그러한 군주의 명령에 따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당시 프랑스에서 마음으로는 신교를 믿으면서도 박해가 두려워 미사에 참여하던 신자들에게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는 법이 국가 질서유지의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인정하였다. 그는 구약의 율법에 대하여 도덕법은 영속적인 것이나 제사법과 시민법과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 폐지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각 국가는 공평과 정의의 원칙을 지키면서 자신의 형편에 맞는 법률을 제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원칙을 지키면서 법률을 제정할 때 사랑의 원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구약의 십계명이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성취하고자 제정되었듯이 각 국가의 실정법도 사랑을 성취하려는 목적을 바탕에 두고 제정되어야 한다.

관리들의 경우에 백성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관리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왕들이 전제정치를 하여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할 때, 당시의 삼부회같은 하급 관리들은 합법적인 수단을 통한 저항권을 가지고 있다. 칼빈은 조심스럽게 저항권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정치형태에 대해서는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 있는데, 그는 우수한 인물들이 선출되어 통치하는 귀족정을 가미한 민주정을 선호하였다. 칼빈의 이러한 정치제도는 교회 안에도 도입되었고, 그의 이러한 정치사상은 오늘날의 민주정치가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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