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

[ 칼빈탄생5백주년 특집 ] ⑪ 칼빈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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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3월 26일(목) 09:44

   
▲ 교회가 세상을 위한 교육이나 성직자를 위한 교육 모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던 칼빈은 제네바 학교법을 제정해 모든 시민에게 학교 문을 개방하고 성직자 및 인재 양성에 박차를 가했다. 삽화는 개혁신학 수립과 성직자 교육을 위해 설립한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신학을 강의하는 칼빈.

칼빈이 개혁교회의 생성과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한 개혁교회와 신학의 아버지인 것처럼, 그는 개혁교회 개혁신학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칼빈과 더불어 개혁교회의 기독교교육이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혁교회적 기독교교육의 본질에 충실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먼저 칼빈에게서 묻기를 시작해야 하는데, 칼빈에게서 기독교교육을 묻는 순간 우리는 왜 그가 개혁교회 기독교교육의 아버지인지를 곧 발견하게 된다. 그는 교육의 실천에 있어서나 이론에 있어서 기독교교육의 근본적 방향을 제시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칼빈이 살았던 시기의 유럽 사회에서는 종교가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의 핵심적 요소였다. 따라서 종교개혁운동은 단순히 교회와 신학만의 개혁운동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사회 전반을 포괄하는 통전적 개혁운동으로 발전될 수밖에 없었다. 루터나 멜랑히톤 부처와 같은 개혁자들처럼 칼빈도 그가 살며 활동했던 제네바시에서 교회법에 의거한 소위 '신정정치(theocracy)'를 펼쳤는데, 그 안에는 당연히 '교육'도 핵심적 개혁프로그램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다시 말하면 교육은 그에게서 부수적인 영역이 아니라 그의 종교개혁 정신을 실천하는 핵심적 통로였다.

1. 학교
칼빈이 제네바 시를 위하여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며 참여하였던 영역은 '학교'였다. 그는 기존의 유럽사회에서 학교가 주로 소수의 성직자후보생이나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것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학교가 성직자 양성 뿐 만 아니라 제네바 시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도 기여해야 한다고 보면서, 칼빈은 학교교육의 대상을 모든 시민으로 확대하는 법 즉 '제네바 학교법(L'ordre des escoles de Geneve)'을 제정하고, 모든 시민에게 학교의 문을 활짝 열었다. 이 학교법을 바탕으로 그는 제네바시에 많은 '김나지움(중고등학교)'과 초등학교의 설립을 도왔고, 또한 기존 학교들의 개혁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는 '일반교육은 학교에서, 기독교교육은 교회에서' 담당한다고 하는 이원론적 사고가 일반적이지만, 칼빈은 교회가 세상을 위한 교육이나 교회의 성직자를 위한 교육 모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고, 세상도 '하나님의 주권'이 다스리는 곳이 되기 위하여서 교회는 세상을 위한 교육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성직자를 위한 교육이나 세상을 위한 교육 모두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독교교육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제네바시의 모든 학교에서 예배와 성경, 교리문답이 가르쳐지도록 하였고, 교회가 학교를 감독하고 '교사'직을 선발할 수 있는 권한을 갖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칼빈의 학교정책은 교회가 학교에 대한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개혁교회 교육의 전통이라고 하는 점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은 또한 신학교육에도 관여하였다. 그는 개혁신학의 수립과 성직자의 교육을 위해 평생 숙원이었던 '제네바 아카데미'를 1559년에 설립하였다. 그는 이 학교를 그의 제자인 베짜(Theodore Beza)에게 운영하도록 하고 스스로는 강의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전 유럽에서 수천의 학생들이 몰려 왔고, 이들이 칼빈의 학풍을 이어갔다.

2. 교회
칼빈이 오늘날의 기독교교육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영역은 무엇보다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무엇보다 교회를 '교육하는 곳'으로 이해하는 교회론적 기초를 세움으로써 개혁교회 기독교교육의 뿌리를 놓았다. 칼빈은 기독교인이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후 지상에서 사는 동안은 끊임없이 '성화'의 길을 걷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교회는 어머니처럼 신자들을 양육하는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기독교강요' 4권 '교회'에 관한 부분에서 칼빈은 "하나님은 인간을 단번에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교회의 교육을 통해 신자들을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케 하려는 뜻을 갖고 계신다"고 하면서 교회를 점증적 성화의 과정에 있는 교인들을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교육기관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교회를 '어머니 교회'로도 심지어는 '학교'로도 언급하면서 신자들은 평생 이 학교를 떠나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교육하는 곳'으로서의 교회이해는 개혁자들 중 칼빈에게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성이다.

이와 같은 교회이해 위에 칼빈은 교회의 실제적 프로그램과 제도를 확립하였다. 그는 제네바 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고, 무지와 무교육 아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알아야 하는 신앙내용을 요약한 '요리문답'을 집필하였다.

그는 제네바시의 모든 교회들이 예외 없이 매 주일 12시면 어린이들을 위한 요리문답수업을 실시하도록 하였고, 같은 시간에 학교와 고아원 기타 사회복지시설에서도 반드시 요리문답을 가르치도록 함으로써 제네바 시의 모든 어린이들이 반드시 기독교신앙의 기초를 배우도록 하였다. 또한 그는 천주교의 칠성례의 하나였던 '견신례'를 성례전으로보다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확실하게 배우는 교육적 관문이 되어야 한다고 보고, 견신례에 요리문답을 배우는 교육을 강화하였다.

칼빈은 그 누구보다 '성인'을 위한 교회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성화'의 과정에 있고, 따라서 어린이나 청소년 뿐만 아니라 성인들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지속적으로 교회의 양육과 지도를 통해 성화를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성인을 위한 기초 요리문답반과 고급 신학반을 설치하여 그의 '기독교강요'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는 또한 모든 교회들이 일 년에 네 번씩 성인을 대상으로 한 '성찬시험'을 실시하도록 하였는데, 요리문답 수업에 참가하지 않은 성인들이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지를 이 시험을 통해 가리도록 하였고, 성찬 시험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위해 직접 '가정심방'을 통해 테스트를 하도록 하기도 했다. "교육없이 수찬도 없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던 것이다. 칼빈은 그러나 교회가 단순히 요리문답과 교리를 가르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교인들의 삶을 직접 지도하고 감독하는 소위 '치리(disciplina)'제도를 정착시켰다. 치리를 통해 교인들은 수찬이 정지되기도 하고 훈계와 경고를 받기도 하였기에 많은 사람들은 치리가 교회의 징계제도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바로 세워가고 교인들의 삶을 지도하는 교회의 교육적 활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칼빈의 교회교육 개념은 그가 어린이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교리뿐만 아니라 삶 전반에 전인적으로 교인을 동반하는 '교육목회'적 개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가정
칼빈은 학교와 교회 뿐만 아니라 가정 또한 교육의 사명을 가진 중요한 장이라고 보았다. 그는 가정을 '작은 교회(parvae ecclesiae)'라고 하였고 부모가 '바른 가르침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자녀를 양육할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한 편으로는 재세례파에 대항하여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부모에게 유아세례에 따른 교육의 의무를 철저히 수행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그는 세례 시에 모든 부모들이 회중 앞에서 자녀교육을 서약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자녀를 바로 가르치기 위하여 교회가 먼저 부모들에게 요리문답교육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발견하는 개신교 최초의 '부모교육'모델이었다.

칼빈은 신학자요 개혁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와 교회 그리고 가정을 모두 아우르는 개혁교회의 기독교교육의 기본방향을 제시하였다. 이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결국 종교개혁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는 '교육'을 통해서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칼빈은 그것을 정확하게 보고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의 교육활동은 갱신하고 부흥해야 하는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그것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하고 구체화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양 금 희 
장신대 기독교교육과 교수
독일 튀빙겐 대학교(Dr. Th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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