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남기려고 하나?

[ 논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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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3월 13일(금) 10:50

최이우/ 종교교회 목사


최전방에서 군목으로 일하던 때의 일이다. 부대장의 탁월한 리더십으로 1년 결산인 RCT(연대전투단 훈련)에서 최우수연대로 평가받았다. 부대장은 이 영광을 흔적으로 남기기 위해 부대(部隊) 정문 밖 도로 옆에 기념비를 세웠다. 작은 정원 안에 받침대를 놓고 '先鋒(선봉)'이라 쓴 돌비를 올려놓았는데, 높이가 족히 3m는 되는 것 같았다. 기념비 받침대 오른쪽 아래 40cm X 30cm 크기의 검은색 돌에 부대장의 이름을 비롯하여, 대대장들과 참모들의 이름을 새겼는데, 영광스럽게도 맨 마지막에 '군종장교 대위 최이우'도 있었다. 
전역하여 부대를 떠난 지 20년만인 지난 2002년 모처럼의 기회에 그 현장을 찾았다. 그 곳에 도착하기까지 내 마음은 온통 그 기념비의 하단에 새겨진 내 이름에 쏠려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는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그렇게도 크고 웅장해보였던 비석이 작고 초라하기만 했다. 세월이 지나 나이가 들면 기력이 쇠하고 몸집이 왜소해지는 것이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계에도 적용되는 것인가? 기념비 아래쪽의 명패는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들이 가려버렸고, 오랫동안 덕지덕지 덥힌 흙먼지에 돌의 검은 색깔조차 분간하기 어려웠으니, 그 돌에 새겨진 이름이야 오죽했겠는가. 손으로 잘 닦아내고서야 그 찬란한 영광의 이름들을 읽을 수 있었다. 지난 20년 동안 누가 이 돌비에 새겨진 이름에 관심하였을까? 아마 그 날의 나처럼 이 이름의 주인공 중 몇 사람이 애써 손으로 닦아낸 뒤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고서는 묘한 허탈감을 경험하고 돌아섰을런지 모를 일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그 흔한 기념비 하나 세우려고 그토록 집념하는 것일까? 이집트는 주전 8천 년경부터 농경생활을 시작하여 나일강 유역에 찬란한 문명을 일구어 내었다. 주전 3천1백 년 메네스(Menes) 왕이 남북 이집트를 통합하고 멤피스(Memphis)에 도읍을 정한 후 알렉산더(Alexander)대왕에게 정복 당할 때까지 자그마치 2천8백년간 바로왕조가 지속되었다. '카르낙신전'과 '룩소신전'이 있는 변두리에 있는 '왕가의 계곡'에는 많은 왕들의 무덤이 있다. 왕들은 즉위한 후부터 지하에 거대한 거주지를 형성하였는데 무덤의 크기로 세력과 영광을 과시하려 하였다.

교회의 지도력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웃지 못할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옴으로 역사는 연륜을 더해가는 것인데, 전임자와 후임자 사이에 묘한 갈등의 흔적들이 드러나고 있다. 새로운 담임자는 빠르게 자신의 지도력을 정착시키려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한 빠른 시간 내에 전임자의 흔적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 전임자가 그 동안 심혈을 기울여 해오던 일들은 중단하거나 축소, 종료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새로운 일들을 시작하고, 이루어낸 일들은 극대화하여 업적으로 남기려 한다. 그리고 교회 역사책을 다시 쓰는 과정에서 이전의 역사는 가능한 한 축소하고, 자신의 임기 동안의 일들은 최대화하여, 많게는 책의 절반 가까이까지 할애하여 거대한 역서를 출판한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반복된다면 어찌하랴!
이제 우리 조금만 겸손해지면 어떨까? 선배들의 수고를 더욱 높이 기리고, 땀 흘려 이루어오던 일들을 그대로 계승 발전시키는 노력을 기울이다가 못다 이룬 일들은 다음 세대에 넘겨주어 계속하게 하면 어떨까? 인생을 '이어달리기' 경주에 빗대어 생각해보면, 내 앞에서 열심히 달려서 넘겨준 바통을 받았으니 나도 최선을 다해 달려서 그 바통을 물려주고는 현장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빠져나와 힘껏 박수쳐주고, 모든 사람들이 달리고 있는 새 사람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조용히 떠나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 아내와 함께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가면 좋을까?'를 얘기할 때가 있다. 아직은 결론에 이르지 못했지만 결론에 접근하고 있는 생각은 다 내려놓고 다 버리고 깨끗이 떠난다는 것이다.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자식들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귀찮은 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은 은퇴 후에 하는 일 하나를 서둘러 한 것이 있다. 서재의 책 약 6천여 권을 몽골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교 교수들을 위하여 보낸 것이다. 지금 비어있는 서재만큼 내 마음은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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