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신앙과 교육적 배경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7> 박형룡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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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3월 10일(화) 09:20

최윤배/장신대 교수ㆍ조직신학


죽산 박형룡(朴亨龍)은 음력 1897년 3월 28일 평안북도 벽동에서 박기수의 장남으로 태어나, 1978년 10월 25일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자택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경기도 파주 청암교회 장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서당에 다니다가 기독교 이념으로 세워진 소학교(小學校)에 입학하였다. 16세에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평양숭실전문에서 공부하다가 중국 난징(南京) 금릉대학을 졸업(B.A.)하고,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수학 후, 켄터키주 루이빌에 있는 남침례신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Ph.D.)를 받았다.

박형룡은 10살(1907)까지 서당에서 한문과 기초적인 유교경전을 공부했다. 그는 아마도 1907에서 1910년 사이에 벽동군 벽동읍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이 교회의 부설기관인 신명(新明)학교에 다녔다. 계인수(C.E. Kearns) 선교사에 의해서 세워진 이 교회는 '예수 천당'을 외치고, 치유의 능력으로 유명한 최봉석목사도 7년 간 시무했다. 박형룡은 1907년 대부흥운동 직후 1910년 무렵에 김익두목사의 부흥설교를 듣고 회심했다. 그리고 그는 1915년 설날 선천북교회의 양백전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평안도에서도 신명이라는 학교가 10여 개나 있었다. 박형룡이 다닌 소학교들은 기독교와 서양 사고방식에 민족주의를 결합시킨 교육을 실시하였다.

박형룡은 만 14세가 되던 1911~12년 무렵 의주에 있는 중등학교인 양실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913년 4월부터 1916년 3월까지 선천에 있는 신성중학교를 다녔다. 1916년 4월부터 1919년 겨울까지 그는 평양에 있는 숭실전문에서 공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난 당시 숭실전문 4학년이면서 23세인 박형룡은 3ㆍ1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1920년 4월 9일에 숭실전문과 연합부흥전도대 강사로서 목포에서 연설한 내용이 문제가 되어 체포되어 약 10개월간 수감생활을 하였다.

중국의 난징은 일찍부터 미국 각 교파의 선교사들이 들어가 활발하게 선교활동을 펼친 곳이었다. 선교사들이 여기에 여러 교육기관들을 세웠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난징대학교(金陵大學校)였다. 박형룡은 1921년에 이 대학에 편입하여 1923년 6월에 학사학위(B.A.)를 받았다. 그리고 박형룡은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1923년 9월부터 1926년 5월까지 약 3년 동안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신학사(Th.B.)와 신학석사(Th.M.) 학위를 받았다. 여기서 그는 변증학을 전공하였는데, 그 목적은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반기독교운동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특히 메첸(J.G. Machen)과 긴밀한 교제를 가졌다.

프린스턴에서 공부를 마친 박형룡은 1926년 켄터키주 루이빌에 소재한 남침례신학교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박사학위 과정은 2년 과정이었는데, 약 10개월간 공부한 후 1927년 우리나라로 영구 귀국하여, 박사학위청구논문인 '자연과학의 반기독교적 추론'(Anti-Christian Inferences from Natural Science)을 미국으로 보내어 1933년 1월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여기서도 그는 변증학을 공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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