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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탄생5백주년 특집 ] 학술기고 ⑥ 국외의 칼빈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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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2월 18일(수) 09:47
   
▲ 칼빈신학을 계승 혹은 반대했던 인물들

칼뱅(J. Calvin, 1509-1564)의 신학사상은 다음 세대의 개신교 신학자들에게 계승되었다. 그의 신학사상은 16세기 유럽 여러 나라에서 시작된 개혁교회(reformed church)를 비롯하여 또 다른 여러 교파들의 신학자들을 통해 발전해 나갔다. 맨 먼저, 그의 제자이며 후계자인 베자(Th. Beza, 1519-1605)는 스승이 쓴 '기독교 강요'를 바탕으로 자신의 신학사상을 개발했다.
 
개혁교회가 발전해 간 역사적 과정에서, 칼뱅의 신학사상은 크게 보아 4개의 주제로 확산되었다. '성경의 권위',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나님 중심의 신앙과 삶(윤리)', '교회' 등이다. 칼뱅이 제네바에서 설립한 아카데미(학교)는 그의 신학사상을 확산시키는 요람이요 교육기관이었다. 이 학교는 엄격한 예정론(이중예정)을 중심으로 교육시켰다. 이렇게 예정론 중심의 신학이 네덜란드의 라이덴(Leiden)대학과 프라넥커(Franeker)대학에서, 영국의 캠브리지대학에서, 프랑스의 세땅대학에서, 헝가리의 데브레첸대학에서 전수되었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대학과 마부르크대학 등에서도 그러한 신학사상을 가르쳤다.
 
칼뱅의 신학사상은 네덜란드의 교회와 사회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맨 먼저, 그의 신학사상은 이 나라가 정치적으로 스페인에서 독립을 쟁취하고 자유의 나라로 발전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그 다음, 이 나라가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번성하는데도 그 신학사상이 크게 기여했다. 1561년에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신앙고백을 작성하였다(Confessio Belgica). 그런데, 네덜란드 개혁교회 안에서 심각한 교리논쟁이 일어났다. '아르미니우스 논쟁'으로 불리는 이 교리논쟁은 칼뱅의 이중예정론에 대한 반박으로 시작되었다.
 
아르미니우스(Jakob Arminius, 1560-1609)가 칼비니즘 정통주의의 엄격한 예정론에 반박하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였다. 그런데, 도르트레히트 총회(Synode von Dordrecht(1618/19))는 아르미니우스의 입장을 거부하고 이중예정론을 확인하였다. 그 이후, 이 나라에서 신설된 대학들(Leiden, Groningen, Utrecht)에서 칼비니즘이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신학자는 보에티우스(Giesbert Voetius, 1588-1676), 코케이우스(Johannes Coccejus, 1603-1669),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였는데, 이들은 계약신학을 발전시켰다.
 
프랑스에서 1559년 칼뱅 개혁교회(위그노)의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다(Confessio Gallicana). 그런데 기성 가톨릭교회와 정치세력이 위그노를 혹독하게 박해하였다. 이것이 '위그노 전쟁'(1562-1598년)으로 발전하였다. 프랑스 위그노 정통주의는 신학적으로 여러 가지 특징을 갖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서 가장 으뜸은 독재 군주에 대한 국민의 저항권을 일깨웠다.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는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사상은 베자(Th. Beza)에게서 배운 것인 바, 국가의 통치자(군주)가 법에 따라 자신의 권력을 정당하게 집행하지 아니하고 불법을 일삼는 포악한 폭군이 된다면, 그러한 통치자에게 국민이 저항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위그노의 신학자 하트만(Franz Hotmann, 1524-1590)은 국민저항권 사상을 계약사상에 근거하여 펼쳤는데, 통치자가 국민과 계약을 맺어서 통치해야 하는데 그 계약은 성경의 언약(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에 뿌리를 두고 있는 바, 통치자는 국민을 대표하는 대표자이고, 대표자인 그는 국민과 맺은 계약의 범주 안에서 자신의 권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계약사상이 나중에 국민주권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칼뱅의 제자 존 녹스(John Knox, 1505-1572)가 스코틀랜드에 칼뱅 개혁교회를 소개하였다.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는 1560년에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Confessio Scotica). 칼뱅의 신학사상은 이 나라에서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와 휘탁커(William Whitacker, 1548-1595) 등을 통해서 계승되고 발전하였다. 이들이 발전시킨 신학사상에는 교회론과 은총론에 그 중심 알맹이가 있었다. 이들은 영국 성공회의 감독교회제도에 맞서서 교회의 회중 가운데서 장로(대표)를 선출하는 대의제도를 발전시켜 나갔다.
 
교회론은 국가론과 맞물려 있었는데,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인 두 왕국사상에 따라, 교회와 국가는 -마치 한 집에 있는 두 개의 방처럼- 서로 구분되어 있으되 세속 공권력을 가진 국가는 교회의 총회를 소집하고 또 일반 국민의 삶을 십계명의 가르침대로 바르게 인도할 권한을 가진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회중 중심의 교회를 지지하는 자들은 세속 공권력(국가)이 교회 일에 간여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다.
 
또 한편,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와 그의 제자 아메시우스(W. Amesius, 1576-1633)는 신학이란 실천적 학문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신앙인은 주체적 개인으로서 그 삶에 신앙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그들이 가르쳤다.
 
종교개혁자 루터(M. Luther)가 교회개혁을 이룬 독일에서도 칼뱅의 신학사상이 일부 지역에서 꽃을 피웠다. 1563년에 '하이델베르그 신조'가 작성되었다. 이곳 개혁교회 신학자들의 커다란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기독론에 있었다.
 
루터교회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은 서로 교류한다고 주장했던 반면, 개혁교회 신학자들은 그의 인성과 신성이 서로 교류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인성은 -사람인 까닭에- 유한(有限)하고 또 그 분의 신성은 -하나님이신 까닭에- 무한(無限)하므로, 신성과 인성이 교류하게 되면 신성 속으로 인성이 흡수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유한은 무한을 포용할 수 없다"(finitum non capax infiniti)는 명제가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성 속으로 들어오지(교류하지) 아니 하고 '그 바깥에' 계신다고 해석되었다.
 
이 '바깥'이란 표현에서 비롯된 'Extra Calvinisticum'(인성과 신성이 서로 교류할 수 없다는 교리)이 칼뱅 개혁교회의 특성을 드러내는 신학사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임 희 국
 ▲ 장신대 교수(교회사)
 ▲ 장신대(M.Div)
 ▲ 스위스 Basel대학교 (Dr.th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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