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순교적 신앙과 삶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한국신학의 개척자들 <5>이성휘교수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1월 07일(수) 09:32

하 경 택 / 서울장신대 교수ㆍ구약학

   
장신대 5대 교장 이성휘목사.
여기에서 이성휘교수의 인품과 신앙의 면모를 살펴보자. 그의 강의를 직접 들었던 '한국기독교순교사'의 저자 김광수의 말을 들어보자(한국기독교순교사, 176-7).

김광수는 조부 김관근목사와 부친 김희선목사를 이어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공산치하에서 신학교에 간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것이었지만, 김광수는 그의 동생과 함께 신학교 입학을 간청하기 위해 당시 평양신학교 교장이었던 이성휘교수를 찾아갔다. 김광수의 사정을 들은 이성휘교장은 눈물을 글썽이더니 "학기 도중인데 규칙에 없는 일이라 교수회의를 열고 의논해 봅시다" 하였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만장일치로 입학이 허락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그의 인자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이었다.

이성휘교수가 교장으로 있을 당시 평양신학교는 경건회 시간만 되면 전교생이 2층 본당 예배실로 올라가 울음바다를 이루어 기도하곤 했다고 한다.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투옥된 종들의 해방을 위하여 하나님께 매달리어 울부짖었다는 것이다. 이때 이성휘교장은 항상 앵앵 울리는 목소리로 시편 24편의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라, 영원한 문들아 머리를 들라, 영광의 임금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임금이 뉘시냐 건장하고 용맹스러운 여호와시로다"를 힘차게 외우곤 했다고 한다. 이것은 환난과 핍박의 시기가 지나가고 여호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광의 날이 올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노래하는 그의 살아있는 신앙 고백이었다. 찬송가는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지켰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를 가장 많이 불러서 모두가 다 외우고 있었다고 한다.

1950년 정월, 몇 달 후의 6ㆍ25 남침을 계획한 북한 공산정권은 민주진영에 대한 대숙청을 감행한다. 북한 민주사상의 중심체 역할을 했던 평양신학교가 눈에 가시와 같지만 폐지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공산정권은 차제에 평양신학교를 어용기관으로 삼으려고 감리교 성화신학교와 강제로 한 학교를 만드는 통폐합을 시도한다. 그러고 나서 학교 이름을 '기독교신학교'라 개명하고 공산정권의 어용기구인 기독교도연맹 산하에 편입시킨다. 당시 감리교에는 서울에 감리교신학교가 있었지만 남북이 갈리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게 되자 1946년 9월 평양에 감리교신학교인 성화신학교를 개교하였던 것이다. 당시 평양신학교에는 약 6백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성화신학교에는 약 2백여 명의 학생들이 재학중이었는데, 각각의 학교에서 60여 명만을 선택하여 총 1백20명 정도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학교에서 축출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1950년 3월 이성휘교수가 새롭게 문을 연 기독신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부교장에는 감리교의 송정근목사, 교수로는 장로교회에서 최지화목사, 감리교회에서는 박대선목사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학교의 실권은 기독교연맹의 하수인이었던 김응순목사가 쥐고 있었다.

공산정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교장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기독교도연맹 부위원장인 김응순목사를 새 교장에 앉힌다. 6월 25일 새벽, 이성휘교수는 반동분자로 몰려 정치보위부에 연행되었으나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북한에서는 평양 탈환 직전 우익인사 대학살이 있었는데 이성휘교수가 이때 순교한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학문과 교역과 삶의 일치에 힘썼던 이성휘는 끝내 자신의 신앙을 지키다 공산정권에 의해서 장엄한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공산당 어용 신학교였던 기독신학교는 한국전쟁과 더불어 완전히 와해되어 소멸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1950년 7월 5일 첫 졸업생을 내고 문을 닫았는데 그 때 졸업생이 노재남, 안병무, 장승찬, 최용문 등이었다. 1957년에는 이성휘교수의 모교인 샌프란시스코신학교 동창회에서 '이성휘 박사 순교 기념패'를 만들어 학교 강당 벽에 안치하기도 했다.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