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논단] 한국교회, 복의 근원

[ 논단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8년 10월 01일(수) 00:00


법과 봉건적 인습이 여성의 재산권은 물론 인권마저도 완전 무시, 여자가 많이 알면 좋을 게 없다면서 중류 이하의 여성 대부분이 문맹이던 1885년,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아들을 따라 한국에 온 스크랜턴 부인(Mrs. Scranton)은 학생들을 가르치려 결심한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에서 학생을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 소위 '양도깨비'에게 딸을 내 주려는 부모가 있을 리 있겠는가.

그러나 이듬 해, 왕비의 통역관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제 발로 찾아온 한 관리의 소실인 '김 부인'과 극심한 가난을 면해보고자 어머니와 함께 찾아온 12살짜리 '별단이'가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이화학당의 첫 학생이 된다. 백여 년 전 정동 한옥의 한 구석방에서 이렇듯 가난하고 초라한 소녀 몇을 모아놓고 시작한 한 학교가 오늘의 '이화'로 성장했다. 하나의 믿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은 것이다.

불합리한 제도, 인습, 그리고 이로 인한 무지 속에서 잠자던 한국 여성들을 역사의 한 복판으로 이끌어내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마음 속에 심어지게 된 시작은 바로 '복 받기 원해서'라는 '기복주의'였음을 부정할 수 없으리라.

교회 밖에서나 안에서 한국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자주 언급하는 단어가 '기복주의'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혹은 성장하는 교회가 신앙의 본질을 영혼의 성장이나 구원에 두지 않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물질적인 축복을 받는 것을 위주로 하고 있다는 것이 '기복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대개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부정적인데다 또 상당 부분이 일반적이고 편협한 시각이라고 몰아 부친다고 해도, 이들이 '기복주의'라고 비판하는 이유를 상당 부분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들의 말처럼 우리가 당장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는데 연연하는 것은 아닌가. 영성은 추구하지 않고 삶에 대한 책임 없는 복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도 숙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인 축복을 받는 측면을 강조했다 해서 무조건 '기복주의자'로 몰아붙이기 전에 본래 '기복주의'가 무엇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기복(祈福)'은 말 그대로 복 받기를 기원하다는 뜻이다. 복을 기원하고 추구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희망이라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복 그 자체가 타파의 대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사모하고 간구해야 한다. 우리에게 복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축복을 받아 우리의 삶이 달라지고, 사회가 달라지도록 만드는 것이 왜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말인가. 물질의 축복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물질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더 쓰임을 받고, 이웃을 위하여 자선을 베풂으로써 받은 축복을 재생산의 도구로 돌린다면 그게 무슨 '기복주의'인가.

문제는 자기 자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복만 달라든가, 자신의 죄는 그대로 남겨둔 채 복만 달라는 기복주의적인 신앙생활이다. 복을 받아서 오직 자신의 유익만을 취하는 것이 기복주의다. 나와 내 가족만 잘 먹고 잘 살면 되니까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하늘에서 비를 내리듯 내려주신 물질의 축복을 이웃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부여잡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그 물을 썩히는 사람들이 기복주의자다. 더욱이 축복을 받을 때는 '좋아라' 하다가도 일이 잘 안되고 힘들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교회를 떠나는 것이야말로 바로 기복주의 전형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복을 받기 원하고, 또 받은 복을 누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천국을 약속해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세에도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뭔가 잘 살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태도는 옳지 않아 보인다.

바라기는 하나님이 주신 그 축복으로 우리 삶과 이 사회를 섬겨야 할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의 근원된 삶이 아닐까 한다. 지금의 한국교회를 향한 여러 가지 비판의 소리가 있지만, 오히려 복의 근원된 한국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