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논단]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선교'

[ 논단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8년 09월 02일(화) 00:00

강 대 운 /목사ㆍ고성교회

주 예수 그리스도의 3대 사역 중 하나가 '선교(Preaching)'다. 선교는 그 안에 교육과 돌봄, 곧 치유가 포함된 것을 알 수 있다. 종교는 지금까지 엄숙히 집행되는 의례(relegere)와 신과 인간의 재결합을 의미(religare)하는 두 가지 학설로 제기되어 왔는데, 이는 어원적 의미일뿐 종교의 본질을 드러낸 정의라고 보기 어렵다. 종교의 감정적 이해가 중요한데 그것은 영원한 것과 절대적인 것에 대한 경외, 감사, 기쁨, 신뢰 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감정의 강도가 종교의 정도를 나타내는데, 이에 지정의(知情意)를 전제로 한 전인적 측면의 체험이 중시되어야 할 것이다. 체험과 경륜이 중시되면서도 전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다소 모순적이지만,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말이다. 어느 한 종교에 있어 체험적이면서도 전인적 품격을 가진 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의도적 알림이 바로 선교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본받고 지상명령을 시행하기 위해서라도 모든 교회들이 선교에 전력을 다하며, 타 종교에 비해 구체적 기획들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80년대 이후 천주교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하고, 불교에도 2%이상 뒤지고 있는 성도 증가율은 무엇을 반증하고 있는가? 작금의 현실에 책임을 가져야 할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 안타까움이 가슴을 억누른다.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이란 말이 있다. 굳이 해설하자면, "본질이 바로 서면 길(방도)이 열린다"이다. 어떤 종교나 사상이든 그 안에 소속된 사람들의 인격, 곧 역할에 따라 그 품격이 달라지고 결정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 쪽에서 보면 언제나 문제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원인을 살피면 내 자신과 내가 갖고 있는 종교의 역할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 다른 사람이나 상대의 종교에 문제가 더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이유와 변명을 덧붙일수록 부끄러움을 자초하는 꼴불견이 될 수도 있다. 진실은 무릎을 꿇고 있어도 강한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다 내려놓고 무엇보다도 진실과 정성으로 내 자신에게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큰 개혁과 변화는 작은 내 자신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그 역할이 진솔하고 분명할수록 상대와 주변에 영향력이 있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감동시키려면 나와 내 이웃에게 지극한 정성으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을 감동시키지 못한 자는 이웃을 감동시킬 수가 없고 이웃, 곧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는 자는 하늘을 감동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본질이다. 성경에 맨 처음 선교적 사명을 받은 자를 굳이 들라면 아브라함이다(창 12장). 그는 가나안에 파송된 선교사로, 공식적으로 '큰 강(유프라테스)을 건넌 사람(Hebrew)'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곳 원주민 중 가장 강한 헷족속들에게 인정받아 그들의 주관자(하나님의 방백)가 되었다(창 23장).

본질에 바로 섰기에 길이 열렸고, 그의 삶에 감동된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주(主)라 불렀으며, 그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함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본질을 잃은 곳, 애굽에서는 오히려 평생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과 망신만 당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처절하게 깨닫고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본질을 회복했을 때 하나님의 인정과 사람들의 배려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땅과 사람을 얻었고, 하늘 창고의 물건이라도 끌어내려 사용할 수 있었던 아브라함이었다. 그리고 육적으로는 유대인의 조상이요, 영적으로는 모든 기독교인의 조상이 될 수 있었다.

요한 바빙크의 견해를 빌릴 필요도 없이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족속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본질은 무엇인가? 당연히 하나님의 양면이 되는 '인자'와 '진실'이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독생자에게 차라리 그곳에서 죽으라고 단언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던 그분이 생각한 것은 위대한 용서를 통한 아름다운 화목이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당함'이다. 영원한 승리를 위해 우리 기독교의 특성인 '당함'의 원리를 다시 찾아와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것은 선교전략의 기저가 되어야 한다. 교회 밖으로 나가기 전에 교회 안에서, 그리고 남보다는 내 자신을 먼저 선교해야 할 것이다.

선교는 결국 기독교의 본질을 통한 '아름다운 감동'이라고 생각한다. 감동을 줄 수 없는 종교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생명 문제를 다룰 수 있으며, 감동 없는 선교가 무슨 방법으로 천고(千古)의 의식을 바꿀 수 있는 동력이 되겠는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그리고 자연 간의 관계에서 가르치고 배우며 느끼는 상호간 '가슴 찡한 그 무엇'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감동은 상호간의 신뢰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것임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믿음,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확신, 그 간(間)에 존재한 자연을 하나로 하여 거대한 한 숨통이 되는 공명화(共鳴化)의 어울림! 이것이 오늘 우리가 다시는 놓치지 말아야 할 '하나님 몸 받은 자'의 선교사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