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논단] '구세주 컴플렉스'

[ 논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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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1월 23일(수) 00:00
임화식
순천중앙교회 목사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제3의 물결'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한 직후만 해도 이 책 내용은 우리 모두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제3의 물결이라 명명되어진 새로운 문명은 우리 사회의 근본을 뒤흔들며 생활양식의 변화, 에너지, 테크놀로지, 가정생활의 패턴, 남녀의 역할 분담, 세계를 연결하는 통신체계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전망했다. 또 그 과정에서 심각한 위기적 상황이 초래될 수 있을 것도 예고했다. 이 미래학자의 예측은 오늘날 대부분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제2의 물결이라 불리는 산업사회를 지탱해 온 낡은 정치 구조가 새로운 제3의 물결로 명명된 정보화 사회의 빠른 변화를 따라 잡지 못하는 것이 위기의 직접적 원인이 될 것'이라는 그의 전망은 적중하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이 사회의 빠른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구태에 머물러 절절 매는 것을 보면서, 국민들은 자신들이 선거로 선출한 정치집단을 불신하게 될 것이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저조한 투표율로 심화 될 것이고, 그 결과로 나타날 위험한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구세주 컴플렉스'라고 경고했다. 토플러는 '구세주 컴플렉스'란 "최고의 권자에 앉은 사람을 교체하기만 하면 자신들이 어떻게 획기적으로 구제되지 않을까"하는 일종의 환상이라고 설명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곤란한 사태를 야기한 원인이 마치 지도자의 리더십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단순한 결론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 강하고 추진력 있는 슈퍼스타를 갈망하며 만약 그러한 구세주가 정치 세계의 지평으로부터 모습을 나타내기만 하면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던 당시 이스라엘의 분위기도 비슷했다. 로마의 박해로부터 다윗왕과 같은 슈퍼스타가 나타나 자기들을 정치적 노예 상태로부터 구원해 주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직전의 분위기가 그랬다.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하셨던 예수님을 사탄은 참으로 절묘한 방법으로 유혹했다.

사탄의 첫 번째 유혹은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이었다. 식민지배 하에서 굶주리고 있는 백성들에게 만일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는 기적을 보여준다면 당장 슈퍼스타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도 갈등을 느끼셨을 법하다. 사탄이 말하는 대로 빵과 자유를 그리워하고 있을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니 사탄과도 제휴를 한 초능력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기만 하면 혜성처럼 나타난 정치적 영웅으로 부상하는 것은 식은죽 먹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일언지하에 그러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대망하고 있었던 인간적인 구세주상을 가지고서 마귀는 유혹하였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가 감당해야할 일은 세상 만민을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는 고난의 종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계셨음에 틀림없다. 예수를 시험하려는 사탄의 관심사는 일차적으로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데 있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간직되어 있는 영적인 가치를 보다 소중히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삶의 자리가 소란스러워지는 것도 우리 인간들의 마음 속에 사탄의 가치관이 들어오면서 부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온갖 개인의 이기적인 탐욕으로 인하여서 오늘날 우리는 총체적 병리사회의 온갖 질병을 앓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의 관심은 병든 영혼, 사탄의 조종을 받고 있는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지 않으면 우리 마음 속에 불신이 자리 잡게 되며, 우리는 배금주의의 노예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기대를 거는 헛된 '구세주 컴플렉스'에 연연하다가, 쉽게 실망하는 것은 소망스럽지 못한 신앙인의 자세다. 사람에게 소망을 두는 것은 허망함만 느끼게 하는 헛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겸허히 인정해야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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