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세이] 凋落의 고궁에서

[ 음악에세이 ] 유혜자 음악에세이(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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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06일(목) 00:00
   
 
 
가는 햇살이 구석에 쌓인 낙엽더미에도 아른거린다. 이제는 순명하려는 순한 숨소리가 들릴 듯하다. 숲 저편에서 이름 모를 새의 목쉰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데 돌담 기왓장을 넘어온 단풍가지에는 선홍 이파리가 아직 떨어지지 않은 채 상록수 이파리를 배경으로 황홀한 빛깔을 자랑한다. 만추의 한적한 고궁은 맑고 투명한 공기로 도회지의 멀미를 가시게 해준다. 문 밖은 현대문명의 혼잡한 거리지만 큰 대문 안의 구중궁궐은 유유자적 그 자체이다. 그런데 이곳에 오면 버릇처럼 생각나는 것이 있다. 더욱이 가을빛에 스러지는 이파리를 보니 역사의 뒤안길에서 아프게 살았던 궁의 여인들이 생각난다. 벼랑 끝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가녀리거나 혹은 굳세게 피어난 꽃들, 사랑의 쟁취로 비상을 꿈꾸다 저버린 역사의 여주인공을 생각하며 걷는 내 앞으로 이어폰을 낀 여대생이 지나간다. 이 주말에 왜 고궁에 혼자 왔을까. 외로운 여대생을 보자 내가 젊은 시절에 가졌던 이름 모를 절망감 같은 것이 생각나서 길도 아닌 곳에서 서성거리게 된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쪽 모퉁이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흘러온다. 은행나무 밑에서 좀 전에 지나친 여대생이 이어폰을 빼고 고궁의 뜨락에 아름다운 음악을 쏟아놓은 것이다. 하르르 하르르 비단 날개를 너울거리듯 독주 바이올린의 결 고운 소리이다. 문득 독주 바이올린의 화려함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러시아의 작곡가 글라주노프(Glazunov, Alexander 1865 ~ 1936)의 하나밖에 없는 바이올린 협주곡(a단조 Op.82)이 생각난다. 하프를 타고 G선상의 선율이 흐르는 아름다운 음악이다. 빨간 단풍처럼 황홀하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가 하면 단풍잎 흩날리는 가을 정취의 분위기에 어울릴 만하다. 차이코프스키보다 25년 늦게 태어난 글라주노프는 러시아의 국민음악파인 림스키 코르사코프 문하에서 관현악법을 배웠는데 러시아적이라기보다 차이코프스키처럼 서구 스타일의 음악을 작곡했다. 바이올린 협주곡 역시 한 곡밖에 쓰지 않은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함께 후기 낭만파의 대표적 협주곡으로 평가 받는다. 고궁에 오면 노력으로 행복을 쟁취하려던 여인과 운명에 순종한 한 서린 여인들의 이야기가 스며있을 것처럼 느껴지듯이 이 바이올린의 뛰어난 서정적인 선율을 들을 때에도 극적인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처럼 생각되었었다. 음악을 흘려놓은 여대생의 청순함에서 푸시킨의 소설 '대위의 딸'을 떠올린다. 러시아 문학의 개척자 푸시킨이 33세(1833년)에 발표한 소설 '대위의 딸'은 푸카초프의 반란을 배경으로, 청순하고 명랑한 사령관의 딸 마리아를 사랑하는 젊은 사관 글라뇨프와 시바불린이 결투를 벌여 정정당당한 글라뇨프가 승리하는 내용인데 소설로, 영화로도 인기를 끈 작품이다. 글라주노프는 '러시아의 모차르트'라 불릴만큼 천재적인 작곡가로서 음악의 여러 장르에서 걸작을 남겼지만 이렇다 할 일화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고궁에 와서 문득 그의 아름다운 바이올린 협주곡의 선율 속에는 '대위의 딸'의 여 주인공인 마리아의 청순미, 발랄함과 사랑을 표현하는 두 남성의 열렬함, 그리고 긴박하고 격렬한 결투 등으로 이어지는 극적인 전개와 낭만이 담겨 있다고 추측해 본다. 글라주노프가 살았던 당시에 푸시킨의 이 소설은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가장 성공작으로 인기를 끈 작품이었다. 이제는 고궁에서 습관적으로 역사 속 여인의 비극을 생각하던 것도 바람에 날리는 낙엽에 실어 보내고 싶다. 어떤 극적인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것처럼 생각되던 글라주노프의 바이올린 협주곡, 오늘은 청순한 아가씨가 흘려준 뜻밖의 바이올린 선율로 '대위의 딸'이 생각나서 오랫 동안 궁금하던 숙제의 해답을 찾아낸 것 같다. 가벼운 마음으로 출구 쪽으로 걸어가는 내 앞에 긴 머리의 아가씨가 다가선다. 내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여대생의 뒤에서 밝게 웃고 있는 청년, 이어폰 줄을 귀에서 떼어내고 청년의 어깨에 기대어 청순하게 웃는 여대생의 얼굴에 초겨울 햇살이 얹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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