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와 격려의 행진곡

[ 음악에세이 ] 유혜자 음악에세이(135)

이수진 기자 sjlee@kidokongbo.com
2007년 11월 06일(화) 00:00

행진곡을 들으면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위풍당당하게 개선하는 군인들의 행렬, 깃발을 앞세우고 멋있는 투구와 눈부신 전투복 차림의 장군과 군인들의 행렬이 입성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그런데 차이코프스키(1840-1893)는 이런 승리, 개선의 축하가 아닌 위로와 격려의 행진곡을 작곡했다. 1876년 러시아와 우호관계인 세르비아와 터키의 전쟁 때,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원조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확대되어 러시아와 터키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치열했던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는 했지만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차이코프스키는 모스크바음악원의 창설자이며 피아니스트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주선하여 세르비아 부상병들을 위로하는 음악회에서 연주할 음악을 의뢰받고 압도적인 박력감과 긴장감을 주는 감상용의 행진곡을 작곡할 수 있었다. 이 행진곡이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지휘로 연주될 때 한 쪽에서 지켜보던 차이코프스키의 심중에서는 아마 이런 말을 속으로 외쳤을 것이다.

"이제는 처절했던 싸움터를 잊어버립시다. 동료가 피 흘리며 넘어지고, 포효하며 다가오던 적군의 함성도. 악몽이었다고 머리를 내젓고 아픈 기억들을 떨쳐버리고 일어나야 합니다. 아침 잠자리에서 기지개를 켜듯이 지나간 시간의 고통과 상처를 씻어냅시다. 심호흡을 하십시오. 전쟁의 회오리바람에서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던 포연의 찌꺼기를 뱉어내야 합니다. 어둠의 장막을 헤치고 피어오르는 눈부신 햇빛을 손을 들어 반갑게 맞으십시오."

이런 차이코프스키의 마음이 전달된 것처럼 위로음악회에서 이 음악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차이코프스키는 멀리서부터 행군하여 다가오는 듯한 어둡고 차분한 울림의 짧은 서두에 이어서 그 음악회에 참석할 주인공들인 세르비아의 멜로디와 러시아의 선율을 도입하여 자신이 그동안 썼던 음악들과는 다른 씩씩한 행진곡을 썼다. 러시아와 세르비아의 우호를 기리고 국민들의 사기를 높이려고 시도한 것이다. 슬라브민족의 강인한 민족정신을 높이 찬양하면서 부상으로 육신의 고통과 좌절에 빠진 이들에게 밝고 힘찬 미래를 그려보게 하는 힘이 있는 곡이다.

곡목이 처음엔 '러시아  세르비아 행진곡'이라고 했다가 악보를 출판할 때 '슬라브 행진곡'이라고 고쳤다. 발레음악으로 행진곡을 쓴 일이 있지만 연주회용으로 이토록 호방하고 근심이나 걱정을 물리치고 힘차게 나갈 수 있는 당당함을 갖게 해서 일반인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이 음악이 겉으로 화려하고 장대하여 폭발적인 힘이 느껴지지만 차분한 울림이 있어서 일반인들에게도 단순한 행진곡 이상의 감명을 주었을 것이다. B 플랫 단조로 차이코프스키적인 우수가 깔려 있어서 묵직한 여운이 남는다.

차이코프스키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어머니가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자라면서 음악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 그리고 네살 때부터 다정다감한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지도로 어학공부를 했는데 감수성이 예민해서 시도 잘 썼다고 한다. 그 여선생님을 떠나 상트페테르크의 법률학교 기숙사 생활이 견디기 어려웠던 그에게 이 시기는 최초의 우울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더욱이 어머니가 돌아가던 14살 때부터 자신의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작곡을 해 온 그는 관리직을 그만두고 안톤 루빈스타인(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형)이 주재하는 음악교실에 들어가서 작곡 공부를 했다. 부모가 원하던 대로 법률학교를 나와 관리생활을 했지만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음악가가 되려했던 꿈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방향 전환을 했던 것이다. 의지하던 선생님과의 이별,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이 밑바닥에 우울로 남았음일까.

차이코프스키는 이 행진곡을 쓴 몇 년 후에 약혼녀의 배신과 또 다른 여인과의 결혼 실패를 겪고, 14년 동안이나 후원자였던 폰 메크 부인의 도움이 끊기는 등 일생의 좌절을 겪게 된다.

부상병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려했던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이 외로울 때는 어떤 것으로 위로를 삼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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