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신학, 바람직한 윤리 실천하는바른교회 육성해야

[ 연재 ] <기획>생활속에 파고드는 이단ㆍ사이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 4 >

이수진 기자 sjlee@kidokongbo.com
2007년 08월 09일(목) 00:00
문 시 영 교수
새세대교회윤리硏 소장
/남서울대ㆍ기독교윤리

이단 없는 사회, 바른 종교를 기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바램이다. 이단은 개인과 사회를 파멸시키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이단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박해를 즐기는 심리에서 이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단을 분별하고 대처함으로써 바른 교회와 사회를 만들고 신앙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역사상 이단이 없던 시대도 없었거니와 스스로 이단을 자처하는 집단도 없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단에 대한 분별이 필요했고 적절한 대처는 필수적이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이단과 사이비는 잘못된 교리, 바르지 못한 신학에서 비롯되었고 그들의 윤리 또한 바르지 못했다. 특히 이단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윤리적 타락과 부도덕성은 개인의 신앙성숙과 사회의 발전을 저해했고 기독교 자체에 대한 막연한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등 심각한 후유증을 낳았다.

이단의 분별 또는 참된 종교의 정체성 확립에서 윤리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현대철학자 베르그송(H. Bergson)은 '열린 종교'와 '닫힌 종교'를 구분했다. 두려움과 강요라는 닫힌 마음에서 나온 종교와 도덕은 인류에게 선택되지 못할 것이지만, 인격적 열망(aspiration)에서 우러나는 열린 마음의 종교는 인류와 사회를 발전시킬 것이라는 생각이다. 여기에 바람직한 도덕의 종교와 일맥상통한다는 통찰이 스며있는 듯싶다. 그밖에 많은 지성인들이 종교와 윤리는 불가분리적 관계에 있으며 상호보완적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도덕성을 갖추지 못한 종교는 주술과 기복의 수준에 머무는 원시종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바른 종교는 바른 윤리를 수반하게 마련이다. 역으로, 바르지 못한 신학은 필연적으로 반사회적 행위들을 낳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최근에 윤리적 순수성을 주장하는 이단도 있다고 한다. 자신들은 '마약도 하지 않고 나쁜 짓도 하지 않는데 왜 이단이라고 하는가?' 항변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심지어 이단의 정체를 숨기고 봉사활동을 통해 정부기관으로부터 표창을 받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부도덕하지도 않고 봉사활동까지 하는 데, 왜 자신들을 박해하는지 항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사회봉사를 한다고 해서, 또는 스스로 도덕적 순수성을 주장한다고 해서 모두를 바른 윤리의 소유자라고 할 수는 없다. 비록 사회봉사를 가장하여 교묘하게 침투한다 해도 이단의 정체는 결국 탄로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바른 신학, 바른 윤리에 대한 분별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가 맺히게 마련이고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마7:17-18) 한 마디로, 선목선과(善木善果)이다. 윤리적으로 바르지 못한 행위들의 뿌리에 바르지 못한 신학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윤리의 문제는 이단의 판별에서 중요한 기준인 동시에 바른 교회를 위한 필수적인 지표가 된다고 하겠다.

이단들 중에는 도덕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부도덕한(immoral) 경우들을 넘어서 도덕 그 자체를 거부하는 도덕무용론 또는 도덕폐기론이 나타나기도 하고 아예 무도덕한(amoral) 상태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에 비추어볼 때, 도덕 없는 종교는 진리일 수 없다. 실제로, 이단의 윤리적 일탈들은 성(性)범죄와 불법적인 축재(蓄財), 그리고 폭력 등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교주나 이단 지도자들이 성적으로 타락한 경우가 많았고 가정윤리를 파괴하는 경우도 드러나고 있다. 그들에게는 종교와 신앙이 자신들의 정욕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린 셈이다. 이것은 이단이 그릇된 신학을 가진 집단이라는 가장 명백한 증거이다. 재물에 관한 비윤리성은 더욱 심각하다. 이단이 재물에 집착하는 것은 그들의 신학이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돈벌이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이것 역시 그릇된 신학의 폐해이다. 그릇된 신학은 인간을 구원하는 진리가 아니라 인간을 이용하고 파멸하게 만든다. 폭력성도 큰 문제이다. 대부분의 이단에서 폭력은 거의 예외 없이 나타난다. 자신들의 단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들의 부도덕한 비밀을 숨기기 위해 폭력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들은 바른 신학에서 확신하고 있는 진리의 최종적 승리,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는 자의 종말론적 승리를 믿지 않는 셈이다. 스스로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종교가 추구해야 할 평화의 방법을 버리고 물리적 폭력으로 인간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그릇된 신학의 결과이다.

특히 이단의 폐쇄성, 즉 '닫혀있음'이 심각한 문제이다. 이단은 자신들의 교리적 오류를 감추기 위해 폐쇄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항상 스스로를 이단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내적으로 구성원들에게는 자신들이 진리때문에 박해받는 소수종파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결속력을 강화시키려 한다. 나아가 신학적으로 바르지 못하기에 이단은 윤리적 일탈과 오류에 빠진다. 자신들의 교리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정당화한다. 심지어 자신들만의 신비한 교리를 위해서라면 윤리 그 자체를 폐기할 수 있다는 만용도 서슴지 않는다. 과연 윤리를 무시하는 종교가 바른 신학과 신앙을 가진 종교라 할 수 있겠는가?

이단, 사이비라는 용어 자체가 '바르지 못한 집단'이라는 뜻이다. 그들을 퇴치하기 위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동시에 바른 신학을 가진 교회, 바람직한 윤리를 실천하는 '바른 교회'를 육성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단을 비롯한 부정적인 집단을 처벌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완전히 근절시킬 수 없다.

여기에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빛이 밝을수록 어둠이 물러가는 것은 지극히 타당한 자연의 이치이다. 또한 긍정적인 기운을 극대화시키면 부정적인 시도들은 위축되고 결과적으로 퇴치될 것이다. 이단에 대한 대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단에 대한 처벌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동시에 바람직한 윤리를 가진 바른 교회들을 육성하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는 이단문제에 대해서 뿐 아니라,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기독교 내부에 발생하는 도덕적 일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우리의 고민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철저한 자기갱신과 탁월한 윤리적 실천이 절실한 시대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곧 바른 윤리, 바른 교회를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바른 신학을 가진 교회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사회가 되어야 사회발전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바른 신앙을 가진 자들이 많을수록 사회가 건전해지고 윤리적으로 성숙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떤 교회가 바른 교회인가? 바른 윤리의 배경에 바른 신학이 있으며, 그 뿌리에 성서가 있다. 역사가 입증한 것처럼 복음적 진리 앞에 갱신되는 기독교, 성서중심의 기독교가 되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는 곳에 바른 윤리를 가진 바른 교회가 세워질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것처럼, 교회는 항상 개혁하는 교회이어야 하며 그 개혁과 갱신의 밑바탕에 반드시 성서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단을 퇴치하는 지름길은 바른 윤리를 가진 바른 교회들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이들을 통해 이단이라는 어둠의 그늘이 걷힐 것이고, 바른 신학을 가진 교회들이 밝은 빛을 발산할 때 사회 전체를 건전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어거스틴은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져 빛을 잃고 헤매었다. 그를 회심시킨 것은 진리의 빛, 성서의 말씀과 하나님의 은혜였다. 회심 후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논쟁을 통하여, 그리고 도나티스트에 대한 목회적 대응을 통하여 진리를 지키는 자로 살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성서의 진리가 그를 일생 진리의 연인이요 진리의 수호자로 살게 했던 셈이다. 그는 '고백록'에서 마니교시절을 회상하기를 '허깨비에 놀아났던 시절'이라고 했다. 진리 아닌 것은 모두 허상이요 거짓일 뿐이다. 거짓은 그릇된 생각과 그릇된 행동을 낳게 마련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서의 밝은 빛, 곧 진리의 빛을 따라 이단과 사이비의 어둠을 물리치며 그 빛이 요구하는 윤리적인 삶을 은혜중심적이고 복음적인 신앙 안에서 깨닫고 실천하는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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