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혜자의 음악에세이] 걸작의 숲에서

[ 음악에세이 ] 유혜자의 음악에세이(130)

이경남 기자 knlee@kidokongbo.com
2007년 07월 18일(수) 00:00
   
어두운 느낌의 피아노 연주로 도입부가 시작된다. 베토벤의 '합창환상곡'의 1부는 피아노 독주부분으로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1942- )이 힘 있고 유연하게 두 손으로 화음을 이루다가 오른 손만의 영롱한 울림이 몇 차례 반복된다. 크지 않은 키에 다부진 모습, 자유자재로 펼치는 환상적인 연주를 보면서 1808년 초연 때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자신이 즉흥적으로 연주했던 모습도 저렇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이듬해 1809년에 지금 연주되는 도입부를 완성했다는데 바렌보임의 깊고 기품이 넘치는 윤기 있는 연주에 베토벤도 만족하리라 여겨진다. 역시 현존하는 3대 피아니스트의 명성에 걸맞는 눈부신 연주를 하고 있다. 바렌보임이 베를린 필, 베를린 합창단의 지휘와 피아노 연주를 맡은 '합창 환상곡(Choral Fantasy)'의 DVD를 보고 있다.

2부는 콘트라베이스가 작은 소리로 행진곡 풍의 선율을 연주하고 나면 장식적으로 피아노가 곁들여지다가 오보에와 호른이 조용한 선율로 이어받고 다시 피아노가 주제를 연주한다. 베토벤이 1795년에 작곡한 가곡 '사랑의 응답'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차용해 온 것이다. 피아노 독주와 오케스트라 협연으로 이뤄지는 2부에서 한 손으론 피아노를 치며 왼손으로는 찌를 듯이 지휘하는 열정적인 바렌보임, 젊고 활기에 찬 행진곡 등 밝고 힘찬 리듬에 보는 이도 땀이 솟을 듯하다.

3부는 피아노가 잠깐 길을 안내하듯이 나오면서 맑은 소프라노가 3중창으로 "우리 삶의 조화는 즐겁고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울린다"고 노래를 시작한다. 이어지는 남성삼중창은 "음의 불가사의한 힘이 지배하고 신성한 언어가 이야기될 때 영광이 만들어지며…"라고 노래한다. 성악과 기악이 함께 연주하는 합창은 "마음에 다가오는 위대한 것이 새롭게 꽃 피네"로 소리가 높아지다가 "아름다운 혼이여, 예술이라는 선물을 기쁘게 받으라. 사랑과 힘이 손잡을 때 인간이 신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으리"라는 구절을 되풀이하면서 박자가 빨라지다가 마지막 클라이맥스로 진행된다.

베토벤은 괴테와 실러 등 시인을 존경했다. 사랑과 평화와 기쁨을 주제로 한 실러(F. von Schiller 1759-1805)의 시 '환희의 송가'에 매료된 17세 때부터 언젠가는 꼭 대작으로 작곡하리라고 마음먹었다. 그 전초 단계로 시인 크리스토프(Christoph Kuffner)의 시에 곡을 붙여 이 '합창 환상곡'을 썼다. 음악사상 단 하나뿐인 '합창 환상곡'은 후일 베토벤의 전 생애를 통해 축적된 사상과 기술의 종합이라는 9번 교향곡 '합창'을 쓰기 위한 전초단계에 쓴 음악으로 연주시간 20분밖에 안 되지만 조성이나 주제의 성격, 주제의 변주에 의해 발전시키는 작곡 기법과 행진곡 악구의 삽입 등 교향곡 '합창'과 비슷한 점이 많다.

베토벤은 이 음악을 작곡하기 1년 전, 황실 궁정극장에 연 2천4백 플로린의 연금과 그 대가로 1년에 오페라 한 곡과 여러 음악들을 작곡해 주겠다는 청원서를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아카데미를 위해 황실 궁정극장을 사용하게 해달라는 긴급요청도 거절당해 실망했다. 아카데미는 다음해(1808년) 빈 극장에서 열었는데 1807년과 1808년에 작곡한 걸작들의 초연이었다. 교향곡 5번 '운명'과 6번 '전원', 미사의 발췌곡들, 피아노 협주곡 4번 G장조, 그리고 이 연주회의 피날레용으로 급하게 작곡된 것이 '합창 환상곡'이었다. 이 중 한 곡만으로도 음악사에서 일생의 대표작이 될 만한 무게를 지닌 작품들이다. 다음해에는 바이올린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황제', 피아노 17번 소나타 '템페스트' 등 늠름하고 웅대한 작품들을 쏟아내었다. 음악사적으로는 이때가 베토벤 중기이고, 베토벤의 전기에서 로맹롤랑이 '걸작의 수풀'이라고 부를만큼 걸작들이 이 무렵에 쓰여진 것이다.

이 '합창 환상곡'이 오늘날에는 높은 평가를 못 받고 있지만 70여 분이나 되는 교향곡 '합창' 대신 산뜻한 기쁨을 얻기 위하여 이 DVD를 즐겨 본다. '합창 환상곡'이야말로 걸작의 숲에서 오묘하게 피어난 키 작은 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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