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고, '민족 정신 배움터'로 1백년간 달음박질

[ 교계 ] 주기철 한경직 김소월 등 걸출한 인재 배출

정보미 기자 jbm@kidokongbo.com
2007년 05월 25일(금) 00:00
   
남강 이승훈선생이 설립한 오산고등학교. 지난 1백년 동안 민족을 위한 지도자들이 대거 배출됐다. 사진은 1910년 배출한 제1회 졸업생들 모습(왼쪽)과 현재 오산고등학교 학생들 모습.
격동의 세월 속에서 나라와 겨레를 구하고자 설립된 학교법인 오산학원이 지난 15일 창립 1백주년을 맞았다.

1907년 7월 평안북도 정주군 익성동.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그 시절 오산학교는 당시 전국적으로 번져가던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창립됐다.

오산학교를 창립한 남강 이승훈선생은 민족 운동에 이바지하는 재목을 기르기 위해, 또한 백성을 교육시키는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학교를 설립했다. 그 결과 고당 조만식, 단재 신채호, 춘원 이광수, 다석 유영모, 사상가 함석헌, 주기철목사, 한경직목사, 소설가 염상섭, 벽초 홍명희, 시인 김소월, 화가 이중섭 등 한국 교회사 및 역사에 남을 기라성 같은 선각자들이 배출됐다.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남강 선생은 교육을 통해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 그는 일제시대에는 항일운동에, 공산치하에는 반공에, 한국 전쟁 때는 나라의 방패로, 건국 이후에는 사회 각 분야에서 나라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 오산인(五山人)들을 길러냈다.

때문에 급변하는 사회 각 방면에서 고루 이바지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며 경(敬), 애(愛), 성(誠)의 성품으로 '오산 정신'이 깃든 전인교육을 교육 목표로 삼았다.

개방적이면서 새로운 것을 갈망했던 남강 선생은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동경한인교회 초대 목회자 한석진목사의 '십자가의 고난' 제하의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다. 그후 남강선생은 학교 안에 교회를 짓고 교직원 학생들과 함께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이 메도록 울면서 주님을 찾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후 민족사학인 오산학교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시편을 애독하며 신앙의 불꽃을 태우기 시작했다.

1916년에 오산학교를 제7회로 졸업한 소양 주기철목사도 남강 선생과 고당 조만식선생을 통해 철저한 민족교육과 신앙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야학과 청년운동에 정열을 쏟은 그는 신사참배가 기독교 교리상 어긋난다며 반대하다가 일본군의 고문 끝에 옥중에서 순교했다.

형무소에 구속되기 전 주 목사는 자택에서 늙은 노모와 처자, 교인들을 향해 "우리 주님 날 위해 십자가 고초 당하시고 십자가 지고 돌아가셨는데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 체 하리이까 오직 일사각오가 있을 뿐"이라는 마지막 설교를 남겼다. 10회 졸업생 한경직목사도 "예수 그리스도, 남강, 고당선생을 만나 오늘의 한경직이 됐다"고 회고한 바 있다.

오산학교 초창기 학생들은 무명옷을 입고 조밥에 된장을 먹으면서도 새벽이면 기운차게 일어나 학교 앞 냇가에서 세수를 하고 안뜰을 쓸고 학업을 마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학교 교사(校舍)를 짓는 일에는 4km가 넘는 곳에서 선생과 학생이 어울려 재목을 함께 운반하며 하나로 단결되는 생기찬 생활풍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오산 졸업생은 당시 사회적으로 검소하고 일 잘하는 학생들로 평가됐다. 오산 동문인 박창환목사(전 장신대 총장)는 "정주캠퍼스 재학시절 3년 동안 아침 6시에 기상해 나팔을 불었다"고 회상하며 "오산학교가 백년간 놀랍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이승훈 선생의 공로"라고 말했다.

한일병합, 1백5인 사건, 3ㆍ1 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8ㆍ15 광복, 정부 수립, 6ㆍ25 한국전쟁, 4ㆍ19 혁명 등 무수한 가시밭 길 속에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꾸준히 도약해 온 오산학교. 겨레얼의 배움터로서 새로운 1백년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오산학교에 기대가 모아진다.

*오산고 졸업생들, 주로 봉사 헌신 직종에 종사

오산학교 졸업생들은 종교인, 교육자, 의사 등 봉사와 헌신 위주의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대체로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오산학교 1백주년 기념으로 출간한 '오산1백년사'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 1907년부터 현재까지의 졸업생 2만5천7백38명 중 종교계에서 종사하는 졸업생은 총 1백4명으로 조사됐다.

이 중 기독교계 교역자는 99명이고 천주교 신부가 3명, 승려가 2명으로 조사됐다. 기독교 교역자가 월등히 높게 나타난 결과에 대해 '오산1백년사'를 집필한 이교현선생은 "투철한 기독교 정신으로 사회 계몽운동과 민족 사상을 고취시키는 데 매진한 남강 선생의 정신이 졸업생들에게 반영된 것 같다"고 평가했다.

교육계의 경우 총 6백30명, 의료계의 경우 2백78명으로 조사됐다. 교육계의 경우 학교 설립자나 운영자가 약 10명, 대학에 근무하는 교수는 1백50여 명, 초등과 중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는 3백여 명, 교장으로 봉직한 사람은 35명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북 정주캠퍼스의 경우 졸업생 수가 총 2천1백명인 것에 비해 1백20명이 교육계에 종사했거나 하고 있어 학생들을 올곧고 바르게 배출하려던 설립 초기의 목적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교현선생은 "남강의 자랑스러운 후예로서 열심을 다하는 오산의 동문들은 남강과 고당 소양 등 이루 셀 수 없는 많은 겨레의 지도자들이 보여준 것처럼 각계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다"며 "오산인들은 우리나라 국민들을 밝고 덕스럽고 힘있는 사람으로 키워가는 일에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자부한다"고 전했다.

한편 경제계와 법조계, 그리고 문화 예술 및 체육분야 등 기타 각 분야의 동문들은 광복 이전에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드물었으나 1954년부터 현재까지 점점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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