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 내 눈 속에 너를 담고서

[ 데스크창 ]

안홍철 기자 hcahn@kidokongbo.com
2007년 05월 01일(화) 00:00
10년도 더 된 아주 오래 전의 일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안 된 아들 아이가 출근하려는 저와 인사를 하다 말고 저의 눈을 빠져라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아들과 저는 아침마다 입맞춤으로 인사를 나누곤 하였는데 그 날 아들 녀석은 제 뺨을 붙들고 요리조리 제 얼굴을 뜯어보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의 눈높이를 알아채지 못한 저는 아침 식사를 하고난 제 얼굴에 뭐가 묻어서 그러는가 싶어 얼굴을 닦아 보았습니다. 하지만 제 얼굴에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물끄러미 제 얼굴을 쳐다보던 아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눈 속에 내가 있다!"

녀석은 제 눈동자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당시 아들은 그 순간이 참으로 경이로웠던 모양입니다. 그 뒤로 아들은 틈만 나면 제 눈을 들여다보며 자기를 확인합니다. 그래서 저는 늘 녀석을 제 눈에 담고 다닙니다.

에피파니(epiphany), 기독교에서 주현절이란 의미로 사용되는 이 단어가 문학에선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세상에 관한 새로운 진리를 깨닫게 되는 순간을 말합니다.

에피파니는 히랍어의 에피파네이아가 어원인데, 이는 나타남(appearance) 또는 현현(manifestation)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 단어가 빛이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나타내고,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에게서 보인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주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발견하고 주를 경배하러간 동방박사들이 느꼈던 경이로움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아들 녀석도 아빠의 눈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것 같았습니다. 당시 저도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녀석이 맑고 투명한 눈으로 제 눈 속에 비친 자기를 보았듯이 세상을 그런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은 사랑과 희망으로 가득하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코흘리개 아들은 어느덧 성년이 되었습니다. 투표권도 생겼고 징병검사 통지서도 나왔고 여자친구도 생겼고…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십년 전,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저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해 봅니다. 심장 박동이 터질 듯 가슴 벅차오르던 순간이었습니다. 제 눈과 귀와 코, 입술 모양을 닮은 아들을 바라보는 그 느낌, 여러분도 공감하시지요?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순간입니다.

아이가 조가비 같은 손으로 저의 손을 잡을 때, 입술을 오물거리며 옹알이를 하고 눈을 마주칠 때, 아빠로서 저는 한 나라를 책임지는 대통령보다도 더 큰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이런 느낌이 어찌 아이 뿐이겠습니까? 흰머리가 성성 나고 이제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아들이지만 여전히 물가에 내 놓은 어린아이 같은 느낌이 들어 새벽마다 차디찬 마루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부족한 자식을 위해 기도하시는 팔순의 어머니, 하루 종일 집안 일로 지친 아내가 제 무릎을 베고 곤히 잠들어 내쉬는 고요한 숨소리… 세상을 바르게 그리고 열심히 살도록 다짐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런 가족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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