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 라포르(rapport)

[ 데스크창 ]

안홍철 기자 hcahn@kidokongbo.com
2007년 04월 26일(목) 00:00
학창시절 심리학 개론 시간에 인간관계 중 가장 친근한 상태를 '라포르'(rapport)라고 한다는 것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라포르'는 어원이 불어로 '흉금(胸襟)을 연다' '가슴속의 품은 생각을 털어놓는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좀 더 구체적으로 ① 일치, 조화를 특징으로 한 관계(with, between) ② 영적 교신(交信), 영교(communication) ③ 의사와 환자 사이의 신뢰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라포르가 그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흉금을 연다'의 뜻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것이 '영적인 교감'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정치가 벤자민 프랭클린은 본인의 자서전에서 "대화의 주된 목적은 가르치는 것, 배우는 것, 즐기게 하는 것이다. 사람을 불쾌하게 하거나 반발을 일으키게 해서는 본래의 목적이 없어져 버린다"고 말했습니다.

라포르가 있는 대화, 마음과 마음이 교감하는 것이 인간관계를 밝게 한다는 뜻이 아닐는지요. 일방적인 명령이나 꾸짖음보다는 마음을 열어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는 것 아닐까요.

성경은 라포르보다 더 깊은 관계를 일러줍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15:13-15)

주님께선 우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고 친구라 불러주셨습니다. 주종 관계는 일방적인 명령과 꾸짖음으로 일관하며 주인의 의중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친구 관계는 자기의 목숨을 내어줄 만큼 가치 있는 것이며 아무 의심 없이 전적으로 믿고 따름을 의미합니다. 또한 아버지께 들은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알게 전해주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영적 교류가 아니겠습니까?

대화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말하기'를 생각합니다만 이는 대화의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대화란 '말하기'와 함께 '잘 듣기'가 합쳐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상대의 말을 들어주기보다는 먼저 말을 하려고만 합니다. 이런 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오해가 생기고 분노를 느끼며 틈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화되면 결국 친구지간이었던 사이가 서로 원수가 되고 적개심을 갖고 살의까지 품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버지니아 공대 참사의 근본적인 원인도 낯선 환경에서 흉금을 털어놓을 친구가 없었던, 원만하지 못한 인간관계가 아니었을까요?

부모와 자녀, 교사와 학생, 목자와 양 사이에 한 가족이라는 일체감과 신뢰감, 나아가 영적 교류가 이뤄진다면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친구' 관계일 것입니다. 슬픔에 잠긴 유가족과 한미 양국의 국민, 모두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정말로 가슴이 따뜻한 '친구'가 아닐까요? 우리 모두에게 그런 친구가 있기를, 또 누군가에게 그런 친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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