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아날로그와 디지털

[ 데스크창 ]

안홍철 기자 hcahn@kidokongbo.com
2007년 04월 16일(월) 00:00
'디카', 디지털 카메라를 줄여 부르는 말인데 국어사전에도 나올만큼 일반화된 용어입니다. 필름이 아닌 메모리를 사용함으로써 편리함과 저렴함으로 무장한 디카가 최근 10여년 사이 세상을 점령했습니다.

취재기자 시절, 마감 당일 밤 늦게 취재가 끝난 뒤 찍은 사진을 현상ㆍ인화할 곳을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일이 불과 얼마 전의 일입니다. 그러나 최근 다시 필름을 사용하는 필름 카메라 '필카'가 유행이랍니다. 디카와 달리 조리개를 맞추고 한번 찍고 나서 인화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그 설레임의 시간을 즐기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지요.

몇 백만 화소의 선명함을 자랑하는 디카, 빠르고 편리한 찰나의 즐거움을 자랑하지만 그저 돈이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셔터를 난사(亂射)한 사진은 그만큼 필카의 감성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카메라 뿐 아니라 타자기는 또 어떤가요? 그 옛날 타자기는 글쇠를 깊고 세게 눌러야 할뿐더러 앞글쇠와 뒷글쇠를 누르는 경계가 조금이라도 틀리면 바로 글쇠가 엉켜 버렸습니다. 정말 또박또박 쳐야 했습니다. 한 자라도 틀리면 파지하거나 수정액으로 지운 후 한참을 기다려 다시 작업을 해야하는 불편함도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요즈음 보편화돼 있는 컴퓨터는 오탈자가 생기면 즉석에서 수정이 가능하고 자동 저장 기능에 연대기별, 목록별, 가나다 순 등으로 자유롭게 분류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타자기를 구하러 고물상을 뒤지는 작가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이를 단순히 옛 것에 대한 향수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안도현 시인의 '사람'이란 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연필은 글씨를 썼다가도 마음대로 지울 수가 있는 필기 도구다. 하지만 만년필 글씨는 한 번 쓰면 더이상 고칠 수 없다. 다시 고쳐 쓸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라는 소리다. 글씨도 삶도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는 거다. 책임을 지지 못하면 만년필을 쓰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만년필이 무척이나 갖고 싶었다."

필자는 작가로서 한 번 쓰면 고쳐 쓸 수 없는 것,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 말하는 한편 첨단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디카 대신 필카를 다시 사용하는 것처럼 아날로그에 대한 회귀, 그것은 옛것에 대한 향수만이 아니라 새로운 것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부드럽고 따뜻한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날로그에 대한 회귀는 비단 필카나 타자기, 만년필 뿐이 아닙니다. 최근들어 좋은 음질의 컴팩트 디스크(CD)가 아니라 다시 '직~직' 비오는 소리가 나는 롱 플레이(LP) 디스크를 들려주는 음악다방이 유행하고 있으며 이 메일이나 문자 대신 우표를 붙여 편지를 보내는 연인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언젠가 출장지에서 엽서를 보냈더니 제가 출장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전화로 안부를 물었고 저보다 늦게 도착한 엽서가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지만 아내는 출장지에서 그리운 사람에게 당시의 감동을 적어 보낸 그 느낌이 그대로 묻어난다며 좋아했습니다. 조금은 느린듯 불편한 듯 하지만 수고와 과정을 통해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 이 법칙이야말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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