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논단] 한국교회 일치를 위한 제언

[ 논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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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3월 02일(금) 00:00

최 병 곤
동산교회 원로목사ㆍ증경총회장

지난호 주간논단에 게재된 '대사면'에서 필자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 헌법개정안 부칙에 대사면 안을 넣기로 했으나 최종 점검하는 과정에서 삭제되었다는 것이다. 공청회 때에 나온 반대 여론 때문이라고 하는데 결국 총회에는 임원회의 발의로 사면위원회가 조직돼 활동하고 있으며, 사면이 아닌 해벌로 용어만 바꾸면 된다고 한다.

'대사면' 글 이후 예장고신 총회장 박무용목사,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장 전병호목사와 며칠간 여행할 기회가 생겼다. 두 총회장은 모두 본교단 총회가 어째서 기장에만 관심을 갖는지 의아해 하면서 예장고신과 복음교회의 경우도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두 총회의 요청에 따라 장로교회사를 다시 찾아보게 됐다.

먼저 본교단과 예장고신의 분열에는 총회가 어떤 제재를 가하거나 책벌을 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 한상동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경남노회 소속 목회자들이 처음에는 순수 보수신앙을 유지하는 목적으로 고려신학교를 설립해 만주에까지 가서 박형룡목사를 초청해 교장에 취임 시켰다. 그 뒤 경남노회원 일부가 자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총회의 지시대로 따르지 않고 이탈해 "우리가 법통 경남노회"라고 자칭했다.

그들은 노회를 세우고 고려신학교를 계속 노회 산하에 두었다가 총회로까지 발전하는 과정을 보였다. 예장고신 교단은 출옥 성도들이 중심이 되었지만 역사를 기술한 이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논평을 하는 이들도 있다.

"독선과 신앙의 교만이 법통이라는 미명 아래 분장되어 있었다". 그들의 분열 뒤에는 메킨타이어 같은 극단적 보수 분열자들의 영향도 가세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대한복음교회는 선교사들의 우월주의에 반발하고 조선인의 자주를 부르짖으며 출발한다. 복음교회를 설립한 이들은 전북 익산의 금마교회에서 박남용을 초청하여 사경회를 개최한 바 당시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마로덕선교사의 허락이 없다하여 당회장의 권위로 이들을 제명하자 반발해 교단을 탈퇴한다. 이후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고창고보를 세운 김제 봉원교회의 윤치병목사를 초빙해 목회케 하고 그후 최태용과 함께 1935년 12월 30일 기독교대한복음교회를 설립한다. 그들은 회집할 때마다 조선장로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었으나 뿌리는 본교단에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장합동과의 분열당시 필자는 당시 졸업반이었다. 제44회 총회가 대전 중앙교회에서 개최되었으나 경기노회 총대 건으로 개회도 못하고 해산하게 되자 연동교회와 승동교회에서 각각 모여 속회해 '연동파'와 '승동파'로 나뉘게 된다. 그러나 많은 교역자와 교회들이 중립에 서있을 때 대타협을 이루어 연동파와 승동파가 통합하여 '통합 총회'를 연동교회에서 개최되어 오늘까지 본교단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통합 총회가 개최된 중에도 일부 회원들은 합류를 거부하고 총회를 조직하여 그들은 예장고신과 합동하자고 하여 '합동 총회'를 개최했으며, '합동'이라는 말은 오늘날 예장합동 교단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같은 한국 교회 장로교회사를 간략하게 보면서 제안하고자 한다. 1907년 평양대각성(부흥)운동 1백주년을 맞이한 2007년 오늘의 시점에서 우선 장로교단만이라도 일치를 위한 주춧돌을 놓자는 것이다. 사면이나 해벌할 것이 있다면 과감하게 시행하고, 과거 총회의 결의에 불복종하여 이탈한 형제 교단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문호를 개방하여 일치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자.

친목을 도모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장로교회 대표들이 모여서 장로교회가 하나되는 길이 무엇인가를 깊이 연구하고, 피차 회개할 것이 있다면 철저하게 나부터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한국 교회에 새로운 성령운동과 부흥운동 그리고 일치운동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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