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세이] 고개를 넘으면

[ 음악에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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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8월 01일(화) 00:00
유혜자

남자 파트너의 폭넓은 바지에 여성 파트너의 화려한 스커트자락이 휘감길 듯 멋지게 돌아간다. 고통과 땀, 분노의 시간이 밀려나고 희망이 넘치는 듯하다. 새로운 약속과 빛나는 장래도 보장되지는 않았지만 순수한 기쁨의 순간을 누리는 듯한 슬라브 춤. 드보르자크(Dvorak, Antonin 1841-1904)의 슬라브 무곡을 듣고 있노라면 유랑 생활하던 보헤미안의 고통과 함께 망망한 시간, 지루하고 아픈 견딤 속에서 영원을 지향하던 드보르자크의 꿈이 생각난다.

고향집에서 가출하여 프라하로 올라온 드보르자크는 오르간 학원을 졸업하고 스무 살 때부터 정열적으로 작곡을 시작하였다. 오케스트라의 비올라 단원으로 일하며, 지휘자인 스메타나에게 작곡을 배웠지만 셋방에서 주인집의 피아노를 빌려 작곡을 했다. 졸업 후 10여 년 동안 무명작곡가로 많은 작품을 썼지만 그의 작품이 연주되기는 서른 살이 다 되어서였다. 자신의 맘에 드는 작품이 써지면 악보 뒤에 '신께 감사를'이라고 쓸 만큼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그는 서른 두 살에야 비로소 혼성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찬가로 인정받자 오케스트라의 비올라 주자를 그만두고 작곡에만 전념했다.


   
특별한 천재도 아니고 체계적인 음악교육도 받지 않은 드보르자크는 서두르거나 욕심부리지 않고 한 발자국씩 고개를 넘듯이 음악가의 길을 걸었다. 미사곡과 현악4중주곡, 합창곡 등 드보르자크의 작품원고는 방안에 쌓여 갔지만 가난은 면할 수가 없었다. 오스트리아정부 장학금을 받기 위해 '모라비아 2중창'을 출품한 것이 서른 네 살 때였다. 장학금 심사위원의 한 사람인 브람스가 드보르자크의 작품에 감격하여 높은 점수를 주고 출판업자에게도 추천해주었다. 또한 그리고 체코의 향토색 짙은 무곡집(舞曲集)을 작곡하도록 권유하였다.

드보르자크는 평소에 보헤미아의 민요 채집을 했던지라 슬라브 무곡을 피아노 연탄곡으로 단숨에 써내려 갔다. 이 슬라브 무곡은 체코춤곡의 대표적 명작으로 역시 브람스의 주선으로 출판되어 세계를 놀라게 한 드보르자크의 출세작이 되었다. 그때 나이 서른 일곱이었는데 이 음악으로 그는 국내에서 애국적인 작곡가로 위상이 높아졌고 세계적인 작곡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체코의 민속음악은 드보르자크에게만 고마운 것이 아니었다. 체코가 오스트리아의 속국이 되자 고향을 등지고 떠난 보헤미아인들은 민속적인 음악과 춤이 있었기에 언제 어디서나 고달픔을 잊었다. 지친 삶을 이어가면서 이 마을을 지나면, 이 고개를 넘으면 살기 좋은 땅에 도달할 수 있을까 희망을 품고 정처없이 유랑하던 보헤미안들은 민속적인 선율과 춤으로 위안을 삼았던 것이다.

보헤미안처럼 고달프게 유랑한 처지는 아니지만 드보르자크에게도 체코의 음악이 사무친 때가 있었다. 그는 프라하 음악원 교수 시절, 뉴욕의 국립음악학교 교장으로 초대되어 갔다. 신생국가에서 태동하는 힘을 느껴 창작 충동을 받았지만 흑인들이 박해받는 것을 보고 체코인들의 어려움을 절실히 생각하며 짙은 향수를 느꼈다. 방학 때 체코 이민촌에 가서 그립던 민속음악을 들은 그는 영감을 받아 대표작인 교향곡 '신세계'와 '첼로협주곡', 현악4중주곡 '아메리카'를 작곡했다. 그의 슬라브 무곡에 쓰였던 민요의 선율은 교향곡 '신세계' 3악장에도 담겨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온다. 그는 음악사상 선배이며 스승이기도 했던 스메타나가 만든 체코의 국민음악을 더욱 발전시킨 세계적인 음악가로 알려져 있다.

높은 명성과 달리, 어렸을 때 부친이 운영한 여관에 머문 유랑악단의 음악이 몸에 배어서인지 소박하고 촌스러움으로 친근감을 주는 드보르자크의 작품들은 자연과 조국에 대한 사랑, 신에 대한 경건함을 담고 있다. 조국에 대한 사랑과 자연의 소박한 향기가 묻어 있는 슬라브 무곡 등 그의 음악을 들으면 일제 강점기에 조국을 빼앗기고 선조들이 만주로, 간도로 떠나가며 뒤돌아보던 고개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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