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 역사가 있다, 강화에 가고 싶다

[ 아름다운세상 ] 역사와 풍물, 다양한 볼거리...섬 전체가 박물관

안홍철 기자 hcahn@kidokongbo.com
2006년 06월 15일(목) 00:00
혼자 여행을 떠나본 적이 있는가? 아무런 계획없이 무작정 떠난 여행이지만 전혀 낮선 곳임에도 불구하고 평화로움을 느낀다거나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느껴진다면 그 여행은 일단 성공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역사와 풍물, 그리고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 강화도는 즐겁고 보람있는 여행을 하기에 적당한 곳이다. 선사시대 적부터 많은 유적지를 간직하고 있는 섬 강화는 고려시대로부터 천여 년 간 역사의 시련과 격동 속에 시달려 온 곳이다. 그래서 강화는 지석묘, 고인돌부터 외적의 침입을 막았던 각종 성터와 돈대 등을 간직한 거대한 박물관과 같다. 고려시대에는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조선시대에는 개화의 소용돌이를 겪은 현장으로…강화는 국란의 위기 때마다 시련을 겪은 역사의 현장이다. 그것은 아마도 서울로 통하는 한강 하류에 위치한 가장 가까운 섬이라는 지정학적 이유때문일 것이다.

   
강화 황청 저수지에서 맞는 아침
강화는 1백13년의 선교역사가 면면히 흐르고 있는 곳이다. 특히 감리교회와 성공회가 왕성한데 이는 1893년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선교부가 선교지역을 설정할 때 강화도는 미 감리교회가 담당토록 지역 배정을 했고 존스(Geo.H. Jones)목사가 인천에 선교 분주소를 정하고 감리사로 강화도를 관할하면서 선교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성공회도 1893년 영국인 워너(L.O. Warner)신부가 갑곶에서 전도지를 배부함으로 선교가 시작됐다.

   
석모도 갈매기
김포에서 강화대교를 건너 강화읍내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곳이 철종이 즉위하기 전 기거했다는 용흥궁과 대몽항쟁의 흔적이 서린 고려궁터와 강화산성이다. 강화산성은 조선 숙종 때 건립한 성곽으로 사적 제1백32호이며 고려궁터는 이름 그대로 고려시대 궁궐 터, 사적 제1백33호이다.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피난할 당시 고려왕조가 기거하던 궁궐로 현재 궁터 내에는 강화지역을 다스렸던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 외규장각이 남아 있다. 동헌과 비슷한 규모의 이방청 건물이 이채로운데, 마당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고목 한 그루가 스산한 분위기를 더한다. 용흥궁은 철종이 강화도령이던 시절에 기거하던 곳으로 본래는 3칸짜리 초가집이었으나 임금이 된 뒤 강화유수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을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붙였다고 한다. 문을 들어서서 오른편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작은 비각에 '철종잠저구기'라 새겨 철종이 머물던 곳임을 표시하고 있다.

   
강화성당
고려궁터를 마주보고 우측의 좁은 길로 들어서면 1900년 11월 15일 축성식을 가진 성공회 최초의 교회인 강화읍 성당이 방문객을 반갑게 맞는다. 외형만으론 도무지 이곳이 성당인지 사찰인지 구분이 안간다. 서구양식 교회당에 익숙한 우리네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천주성전(天主聖殿)의 모습은 세월의 연륜과 함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들어가는 길목에 태극무늬가 그려진 사찰의 일주문 양식의 외삼문을 볼 수 있다. 이를 지나면 본당의 모습도 대웅전과 닮았고, 외, 내산문을 거쳐야 본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도 사찰의 구조와 흡사하다. 정원에는 유교의 상징물인 회화나무와 불교를 상징하는 보리수가 서 있기까지 하다.

강화읍성당의 면모는 당시 선교사들의 선교이념을 잘 반영하고 있다. 1천여 년 간 이 나라를 지배해온 불교의 영향,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으며 쌓여온 주민들의 피해의식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선 폭넓은 사랑과 관용이 필요했던 것. 하여 이 성당은 바실리카 양식을 동양화하여 한국인을 위한 성전으로 토착화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이렇게 성공회는 강화읍성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1904년에는 성공회 영세신자가 2백여 명이나 됐는데 그 중 4분의 3이 강화신도였다고 한다. 1914년 당시 성공회의 교세는 강화읍과 온수리 성당에 1천7백여 명의 신자와 1천여 명의 견진자가 있었다고 한다. 인쇄소가 설치돼 성서, 기도서 뿐아니라 3.1운동 문서와 같은 독립운동 문서도 발간했고, 청소년과 여성을 가르치는 학교가 교회 부설로 생겨나기도 했다. 1914년 성 미가엘 신학원이 설립됐다가 2년 만에 폐교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이듬해 김희준(마가) 신부가 서품돼 강화읍성당의 담임을 맏은 최초의 한국인 사제가 된다. 이렇듯 강화읍성당은 명실공히 성공회의 요람이라 할 수 있다.

   
광성보에서 바라본 서해 바다
강화읍성당을 나와 48번 국도 건너편 골목으로 가면 언덕배기에 우뚝 솟은 교회가 보인다. 이 교회가 엄밀히 따져 성공회보다 먼저 강화도에 전래된 강화중앙교회이다. 현대적인 건물로 신축하여 외형상 옛 흔적을 찾아볼 순 없지만 강화에서 1백5년의 역사를 지닌 동 교회는 전통과 규모 면에서 강화의 종주적인 교회로 불리우고 있다. 감리교의 강화 전래는 최초의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인천을 기점으로 세운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를 중심하여 이뤄졌다. 1893년 내리교회에서 파송된 김기범 이명숙 전도자에 의해 세워진 교산교회가 강화 최초의 감리교회로 알려져 있다.

   
광성보 성터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선교정책으로 강화도는 감리교회와 성공회가 주종을 이뤄오다가 60년대 들어서 장로교회가 세워졌다. 1958년 내리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우들이 1959년 2월 대한예수교장로회 황해노회에 가입돼 신천교회를 이뤘으며 마찬가지로 1958년 강화읍 감리교회에서 분리한 하우덕 장로를 중심으로 한 교인들이 196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경기노회에 소속돼 성광교회를 설립했다. 성광교회 역시 강화읍성당과 강화중앙교회와 세꼭지점으로 만나 현재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성공회가 함께 삼각주를 이루며 지역 복음화에 협력하고 있다.

강화의 대표적인 세 교회를 지나 48번 국도를 따라 5킬로미터 남짓 가면 지석묘 입구가 보인다. 하점면 부근리에 있는 지석묘와 청동기시대의 북방식고인돌은 사적 제137호이다. 이 고인돌은 강화도에서 가장 큰 규모로 두장의 지석 위에 올려진 개석(蓋石)은 길이가 7.1미터 , 너비가 5.5미터나 된다. 지석묘를 구경하고 계속 48번 국도를 달리면 외포리라는 선착장이 나탄나다. 외포리는 강화읍에서 섬을 서쪽으로 가로지르는 곳에 있는 자그마한 포구이다. 요즈음 외포리에 가면 밴댕이 회가 제철을 맞아 여행객의 입맛을 돋군다. 횟집 아저씨가 밴댕이는 6월에서 7월 사이에 나는 것이 가장 싱싱하고 맛있다고 귀띔해준다. 석모도는 카페리로 10분 정도면 건널 수 있는데 석모도 뱃길에서는 갈매기와의 데이트를 즐길 수도 있다. 또 마음이 내키고 시간이 허락되면 서해 낙조로 유명한 민머루해수욕장까지 다녀와도 된다. 푸른 바다와 작은 섬, 산과 들의 아름다운 조화는 석모도의 힘이다.

   
성광교회
강화 남단은 매력적인 자연풍광을 지닌 곳이다. 갯벌과 바다, 그리고 산과 들이 한 몸으로 뒤섞여 강화에 반하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고인돌, 박물관, 미술관 같은 인공 조형물이 많은 북부와는 사뭇 다른 얼굴로 방문객을 반긴다. 남단 여행길은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을 잇는 역사기행길. 해안을 따라 설치된 돈대며 진들 중 백미는 광성보, 전망 좋은 역사공원으로 광성돈대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를 끼고 있다.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안해루 너머로 다이아몬드 모양의 광성돈대가 복원돼 있으며, 내부에는 조선시대의 주포였던 홍이포를 포함한 다양한 포들이 전시돼 있다. 신미양요 때 순국한 용사를 기리는 신미순의총을 지나면 손돌목대와 용두돈대가 차례로 나타나는데, '손돌목의 아이 목숨'이라는 말처럼 깍아지른 듯한 절벽 밑으로 유유히 흐르는 염하를 만난다. 용두돈대 끝 무명용사비 앞은 강화여행을 기념하는 사진촬영 장소로 인기다.

48번 국도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재미있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마라(쓴물) 칼슘탕'. 히브리어로 '쓴물이 있는 곳'을 뜻하는 마라(Marah). 이름처럼 쓴 맛이 나는 물을 온천수로 쓴다. '기적의 물'이라는 입소문이 난 곳답게 각종 질환에도 효능이 탁월하다고 하는데 취재일정이 빠듯해 가보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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