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칼럼/월드컵 또 하나의 우상

[ 논설위원 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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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5월 24일(수) 00:00

문성모(서울장신 총장 서리)

바야흐로 월드컵의 계절이 다가왔다. 4년 전 우리는 종교화된 스포츠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보며 놀랐다. 지난 2002년 월드컵 기간 중 한국팀의 경기가 있던 날에는 거의 모든 직장이 오전 근무만 하고 학교가 휴교나 휴강을 하고 심지어는 저녁 경기가 있던 날은 예배 시간이 조정되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한국의 경기가 있는 날 부흥회 시간마저 변경되거나 연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다음날 새벽기도회는 초토화되었다. 금요 집회의 순서들이 월드컵에 밀려버렸다.

월드컵 경기가 절대 우선이 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백년이 넘도록 어떤 고난이나 박해에도 한국 기독교는 예배를 절대 우선으로 알고 살아왔으나 이러한 신념은 월드컵을 통하여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상적인 시간에 아무런 동요 없이 정해진 시간에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거의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박해를 받는 수준의 행동이었다. 불신자들로부터 왕따를 당해야 하고 같은 신자들에게 조차도 융통성 없는 근본주의적 신앙인이라는 따돌림을 감수해야 했다. 물론 예배시간 자체가 율법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박해시대의 총칼 앞에서도 끄떡없었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시간이 월드컵의 위력 앞에서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모습에서 일종의 영적 공포감마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4년 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다시 오는 월드컵을 앞두고 우리는 몇 가지를 반성해야 한다. 우선 예배가 인본주의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한 예배가 아닌 사람을 위한 예배로 전락되어 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위한 예배라면 천재지변이 아닌 한 정해진 예배시간을 지키려는 고급종교로서의 뚝심과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하였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오랫동안 너무 숫자놀음에 치우쳐 있었다는 것이다. 예배는 드려야 하겠는데 사람이 오지 않을 것 같으니까 예배는 약식으로 하고 교회당 안에서 월드컵 경기를 방영해주는 일도 있지 않았는가? 이는 주객이 전도된 비참한 현상이다. 사람들은 예배드렸다는 면죄부를 얻고 관심은 축구경기에 있었으니, 이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지 않은 가증하고 위선적인 예배의 현장이다. 축구 경기를 보려는 조바심으로 설교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고 예배의 모든 행위들이 거추장스런 요식행위로 인식되어지는 예배가 다시 있어서는 안 되겠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성직자의 영적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교인들의 성화 때문에 목회자가 목회적 소신으로 예배를 진행할 수 없어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예배시간을 타협해버린 경우도 많았다. 예배의 자리가 흔들릴 때 신앙의 모든 기준도 상황에 따라 편리한 대로 변질될 수 있으며, 결국 남는 것은 영과 진리가 아닌 육적 쾌락과 실리위주의 신앙뿐이다.

오늘날 월드컵을 비롯한 스포츠는 또 하나의 우상이요, 이와의 투쟁은 변형된 박해요, 이와의 타협은 신앙적인 유혹이다. 스포츠(Sports)가 우상이 되어버린 현대판 박해시대를 사는 우리 신자들이 예배에의 자존심을 세우고 존귀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소중함을 지킬 수 있는 무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또 하나의 S인 영력(Spirit)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영적 권위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스피릿(Spirit)'이야 말로 일과성의 청량음료가 아니라 이 사회의 근본적인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생수임이 분명하다. 정치가들이 그들의 정권유지 차원에서 스포츠를 적절히 이용하려 할 때 교회는 진정한 민족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또 하나의 S의 물결을 만들어야 한다. 이 민족의 살길은 스포츠가 아닌 스피릿에 있다. 그리고 이것을 가리켜 주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다. 교회마저도 3S에 휩쓸리는 경향을 보며 스피릿(Spirit)을 더 강조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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