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칼럼 / 이런 사람을 길러낸다면

[ 논설위원 칼럼 ] 손달익 / 서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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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5월 18일(목) 00:00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그룹이 등장하면서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의 문화와 어른들의 문화가 완전히 분리되었고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장벽처럼 등장했다.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빠른 템포와 강한 비트, 그리고 랩으로 이어지는 노래들의 뜻을 알기도 어렵고 부르기는 더욱 불가능하다. 그런데 우리와 너무 다른 문화를 즐기며 사는 새로운 세대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무한의 책임감과 의무를 느껴야 한다. 이들을 개성 있고 창의적인 인재들로 양성해서 적응력과 경쟁력 있는 선교세대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색다른 세대를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환경의 개선?

흔히 기성세대의 책임 가운데 한 가지가 새로운 세대들이 악한 것을 본받지 않고 자라갈 수 있는 거룩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환경은 인격과 가치관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환경이 모든 것의 해결책이 된다는 생각은 신앙적이지 않고 경험에 비추어 볼 때에도 사실과 다른 측면이 많다. 환경이 가져다 준 장애와 도전을 극복하면서 오히려 암울한 역사현실에서 소명을 느껴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열수 있었던 것이다. 고통스럽고 힘든 환경은 오히려 삶의 의지를 강화시키고 성실하게 살아야 할 동기를 촉발시키고 분명한 삶의 좌표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때문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나쁠 것 없는 일이지만 이 일이 미래 세대들의 삶을 위한 궁극의 열쇠는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문제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굳건히 지키고 유지해 나가야할 가치관과 이에 바탕한 건강한 인격을 형성하도록 돕는 것이다. 여기에서 참된 삶의 진정한 능력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성숙한 인격의 능력

옛말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하였다. 그런데 그 수신(修身)의 경지가 쉽지 않다. 인격이란 교육과 경제적 풍요등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역작용할 가능성도 무척 크다. 그렇다면 성숙한 인격은 어디에서 오는가? 성경에서 무르익은 인격적 성숙으로 주변을 감동시킨 많은 인물들 가운데 요셉은 대표적 경우이다. 약관 30세의 히브리 노예 출신 죄수가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그의 삶을 품위 있게 만든 것은 그의 인격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신뢰받는 사람이었으며 자기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 감옥행을 마다하지 않는 고단위의 자기관리 능력을 지녔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았고 모든 사람의 잘못에 대하여는 늘 관대했다. 특히 그의 관대함과 포용성은 창세기의 결론부분을 매우 화려하게 장식하면서 히브리인들의 동족애에 대한 교과서적 교훈을 남긴다.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다 순교한 소양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 때문에 상담하기 위해 찾아온 동료들에게 '죽는 것은 나 하나로 할 것이니 그대들은 피하라'고 권유했다. 그는 생전에 신사참배를 결의한 총회나 자신을 파면하고 가족들을 교회사택에서 추방한 노회에 대하여 단 한번도 섭섭한 표현을 한 적이 없었다. 늘 '그분들의 본심이 아닐거다'고 주변을 다독였다. 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타인에 대한 관대함이 그 인격의 중심이었다. 요셉의 인격도 그러했다. 그런데 성경은 요셉의 이와 같은 인격적 능력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창 41:38) 모든 인성은 영성에 근거한다. 영성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신이 떠나버린 사람에게서 비인간화와 인격파탄적 모습을 쉽게 보는 것도 모든 인격적 요소가 영성에 근거함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 영성적 인격이 있어야 주변을 감동시키고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확실히 오늘의 젊은이들은 우리와 다르다. 각 가정마다 이로 인하여 충돌과 갈등이 생기고 부모들은 '헛고생하며 살았다'고 한탄하기 일쑤다. 그러나 저들이 우리와 같다면, 같은 안목을 가지고 같은 유형의 삶에 만족한다면 그들과 우리 모두의 미래는 희망이 있을 수 없다. 다르기 때문에 발전을 기대할 수 있고, 변혁과 새로운 창조에 대한 가능성을 희망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다르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과는 의미를 달리하듯 우리와 다른 문화를 즐기고 다른 유형의 삶을 추구한다하여 나쁘게 보는 것은 정당한 자세가 아니다. 단지 너무 다른 양식의 삶을 추구하고 다른 문화를 즐기지만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영성에 뿌리를 둔 인격을 개발하고 키울 수 있다면 저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큰 그릇들로 쓰이게 될 것이다. 암울한 환경을 넘어섰던 요시야 같은 청소년,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인격으로 주변을 이끈 요셉 같은 청년지도자…… 이런 사람들을 길러 낸다면 험한 세상 고생하고 사는 보람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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