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람을 길러낸다면...

[ 논설위원 칼럼 ] 논설위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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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5월 11일(목) 00:00
'오늘날은 어머니와 딸의 세대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공통점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라고 미국의 한 여성 심리학자는 지적했다. 지난 20세기의 중반까지만 해도 청소년들은 그들의 어른들을 모델로 삼고 그들을 닮아가기 위해 열심히 모방하면서 많이 닮은 것에서 어른됨의 느낌을 갖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도무지 닮으려 하지 않고 또 닮고 모방해서는 새로운 문화적 트랜드에 적응할 수도 없다. 그만큼 다른 문화적 환경과 사회적 욕구 속에서 자신들이 희망하는 미래를 향해 솔직한 고백과 함께 자기의 길에 몰입해가는 특성을 지닌다. 그래서 우리와는 모든 것이 다를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그룹이 등장하면서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의 문화와 어른들의 문화가 완전히 분리되었고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장벽처럼 등장했다.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빠른 템포와 강한 비트, 그리고 랩으로 이어지는 노래들의 뜻을 알기도 어렵고 부르기는 더욱 불가능하다. 그런데 우리와 너무 다른 문화를 즐기며 사는 새로운 세대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무한의 책임감과 의무를 느껴야 한다. 이들을 개성 있고 창의적인 인재들로 양성해서 적응력과 경쟁력 있는 선교세대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색다른 세대를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환경의 개선?

흔히 기성세대의 책임 가운데 한 가지가 새로운 세대들이 악한 것을 본받지 않고 자라갈 수 있는 거룩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또는 너무 고통스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여유 있는 삶의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어 한다. 물론 환경은 인격과 가치관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환경결정론'을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환경이 모든 것의 해결책이 된다는 생각은 신앙적이지 않고 경험에 비추어 볼 때에도 사실과 다른 측면이 많다. 예컨대 히스기야 왕과 요시야 왕의 경우를 보자. 그들은 역사에서 가장 포악한 정치를 했던 선왕들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들은 성장기에 권력의 남용과 우상숭배, 그리고 강대국들의 비위맞추기에 급급한 정치현실, 무죄한 자의 피로 예루살렘을 물들였던 유혈통치의 과정을 목격하면서 성장했다. 그들의 성장환경은 절망적 요소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사밧 왕과 더불어 '하나님께 정직히 행하고 다윗의 모든 길로 행했다'라고 극찬 받는 선정을 베풀어 구약 역사가들로부터 개혁정치의 표본적 인물들로 소개되고 있다. (왕하 22:2) 어떤 환경 속에서도 굳건히 지키고 유지해 나가야할 가치관과 이에 바탕한 건강한 인격을 형성함에서 참된 삶의 진정한 능력이 생겨남을 그들의 생은 증언하고 있다.

성숙한 인격의 능력

인격이란 인간의 본성적 생각과 욕구들이 교육과 훈련, 그리고 신앙등에 의해 잘 정돈되어 나타나는 한 인간의 총체적 모습이다. 이런 잘 정돈된 성숙한 인격은 자기 삶을 품위 있게 하고 주변을 크게 이롭게 하는 영향력 큰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옛말에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하였다. 그런데 그 수신(修身)의 경지가 쉽지 않다. 한때는 인격적 부실이 무지와 가난에서 기인한다고 보기도 했다. 사실 무지와 가난이 품위 있는 삶을 유지하는 일에 도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선 세대들 보다 훨씬 더 교육받고 비교할 수 없는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우리가 과연 선배들 보다 더 인격적인 세대요, 품위 있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다고 할 수가 없음이 사실이다. 인격이란 교육과 경제적 풍요등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역작용할 가능성도 무척 크다. 그렇다면 성숙한 인격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그 근원을 성경에서 알 수 있다. 성경에서 무르익은 인격적 성숙으로 주변을 감동시킨 많은 인물들 가운데 요셉은 대표적 경우이다. 약관 30세의 히브리 노예 출신 죄수가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그의 삶을 품위 있게 만든 것은 그의 인격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신뢰받는 사람이었으며 자기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 감옥행을 마다하지 않는 고단위의 자기관리 능력을 지녔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았고 모든 사람의 잘못에 대하여는 늘 관대했다.

특히 그의 관대함과 포용성은 창세기의 결론부분을 매우 화려하게 장식하면서 히브리인들의 동족애에 대한 교과서적 교훈을 남긴다. 그런데 성경은 요셉의 이와 같은 인격적 능력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창 41:38) 모든 인성은 영성에 근거한다. 영성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신이 떠나버린 사람에게서 비인간화와 인격파탄적 모습을 쉽게 보는 것도 모든 인격적 요소가 영성에 근거함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 영성적 인격이 있어야 주변을 감동시키고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확실히 오늘의 젊은이들은 우리와 다르다. 각 가정마다 이로 인하여 충돌과 갈등이 생기고 부모들은 '헛고생하며 살았다'고 한탄하기 일쑤다. 그러나 저들이 우리와 같다면, 같은 안목을 가지고 같은 유형의 삶에 만족한다면 그들과 우리 모두의 미래는 희망이 있을 수 없다. 다르기 때문에 발전을 기대할 수 있고, 변혁과 새로운 창조에 대한 가능성을 희망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다르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과는 의미를 달리하듯 우리와 다른 문화를 즐기고 다른 유형의 삶을 추구한다하여 나쁘게 보는 것은 정당한 자세가 아니다. 암울한 환경을 넘어섰던 요시야 같은 청소년,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인격으로 주변을 이끈 요셉 같은 청년지도자…… 이런 사람들을 길러 낸다면 험한 세상 고생하고 사는 보람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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