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방의 꽃, 생강나무

[ 산방일기 ] 장돈식의 산방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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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4월 05일(수) 00:00
글 장돈식 그림 김지혜

조간(朝刊)신문 1면의 사진이 화려하다. 지리산 자락이 노란 꽃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지난 어느 해, 4월초 섬진강변의 매화를 보며 차를 달렸을 때에도 그랬다. 저건 생강나무 꽃이다. 이상도 하지? 추운 강원도에서도 3월에 피었다가 졌다. 물으니 생강나무 꽃이 아니고 산수유(山茱萸)라고 했다.

   
키도 비슷해서 줄기가 3미터 정도의 관목으로, 이 나무들의 산형(?形)으로 피는 자잔한 황금색 꽃만을 멀리서 보고서는 '산수유'와 '생강나무'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식물분류상으로는 생강나무는 '녹나뭇과'에 속하고, 산사람들은 '개동백나무'로 일컬었고, 열매는 거문 콩알 같은데 그 열매를 짜낸 것은 동백(冬栢)기름으로 오랜 세월 우리나라 아낙네들의 두발(頭髮)을 윤택하게 해 주었다. 산수유(山茱萸)는 층층나뭇과에 딸린 식물로 그 빨간 열매는 말려서 한약재로 상용(賞用)되고 있다.

나의 산방 둘레에는 생강나무가 많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 나무를 좋아했기에 관심을 가지고 가꾼 결과다. 옛날과 달리 여인들의 머릿기름으로서의 역할에서 해방이 되자 개동백의 씨앗을 따는 사람이 없어졌다. 그러자 이 열매를 즐겨 먹는 새들로 해서 쉽게 온 산에 퍼져 나간다. 먹기는 하되 소화가 덜 된 씨앗이 온 산에 파종이 되는 것이다.

내가 이 꽃을 상찬(賞讚)하는 데는 이 나무가 사는 모습에서 나의 살아온 과거를 비춰보며 상련(相憐)의 정을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늦겨울이 기승을 부리는 3월, 앞ㆍ뒷산 그늘진 곳에는 아직 잔설(殘雪)이 누더기같이 깔려 있고, 기온도 영하 10도를 오르내린다. 산마루에서 불어 내리는 찬 바람이 피부를 에이는 계절에 꽃을 피우는 용기다. 살풍경한 '빈산에 노랑꽃'을 피우는 봄의 전령, 이 생강나무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1962년 봄이었다. 나는 미국행을 결심했다. 당시만 해도 인구의 75퍼센트가 농민인 나라에 태어났고 우리 집안은 선대부터 농업에 종사했다. 우리 농촌은 서구농업에 비해 너무 뒤떨어져 있었다. 앞선 나라의 선진농법과 종축을 도입하고 싶었다. 여권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쉽게 시청이나 구청에서 여권을 내주는 시대가 아니었다.

여권 신청의 기본인 증명들은 동사무소와 구청에서 떼고, 장황하고 거창한 사업계획서를 만들어서 시와 도청의 농산과를 거처 농림부 축산당국으로 올린다. 결재가 나면 외무부 여권과로 간다. 여기까지 경로에는 1백50여 개의 결재도장을 받아야 했다.

우리나라 관공리가 한 부서에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전부 발로 뛰어야 했고, 부서에서마다 지렁이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만큼의 설명으로 한고비씩 넘겼다.

마침내 미국 시카고의 한 종계(種鷄)회사를 노크할 수 있었다. 저들은 자기 농장을 보여준다며 자가용비행기를 타라고 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계사군락(鷄舍群落)은 바다만큼 넓었다. 저들의 산란계(産卵鷄)는 1년에 270개를 낳는다고 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이 알을 낳는다는 '안양국립종계장의 닭'은 연산(年産)160~170개였다. 금값 버금가는 비싼 값을 주고 미국닭 종자 병아리 도입계약을 하고 귀국했다.

미국에서 보낸 병아리들은 김포공항에 모두 건강하게 도착했다. 문제는 통관이 안 되는 것이다. 산 병아리를 통관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다급해진 나는 농림부로, 세관으로, 법제처로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었다. 그 1주일동안 미국에서 온 종자 병아리들은 한국이라는 희한한 나라의 세관 창고에서 모두 굶어죽었다.

다시 집념으로 1년을 뛰고서야 법을 제정했고, 이듬해 1963년의 이른 봄, 드디어 3백 마리가 무사 통관해서 한국양계를 10년은 향상하는데 공헌했다는 생각을 한다. 추운 하늘 아래서 꽃을 피우는 저 생강나무를 보며 옛날을 회상하노라니 괜스레 눈가가 젖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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