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온 것들을 만나며

[ 음악에세이 ] 유혜자의 음악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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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2월 08일(수) 00:00
유혜자

지난 가을 청계천 변(邊)에 들어섰을 때 생각보다 작은 규모라 울 안에 들어선 안온함이 느껴졌다. 급속한 변화에 발맞추노라 고단하던 어른들은 자신의 혈관이라도 맑아진 듯 환한 얼굴이고, 아이들은 한여름의 물풀처럼 싱그러워 보였다.

   
새로 꾸며진 청계천의 구석구석이 밝고 소박하게 표현되어 친밀감 있고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구성하려고 한 점이 느껴졌다. 삶의 무거운 옹이들을 벗어버린 듯 구경나온 사람들의 표정이 가슴 가득 희망의 불씨를 안고 가는 듯했다. 새로운 청계천이 바위나 흙을 뚫고 내려온 자연이 아닌 인공 냇물이지만 청계천이 생태계로, 자연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의심했던 사람들의 마음도 찰랑거리게 했으리라. 너울거리는 풀이나 나무, 꽃은 심었다해도 물가의 오리가 물 속에서 먹이를 쪼아대는 것을 보면 생명의 수로임을 알겠다.

세운교 밑을 지나니 여울이라고 쓴 팻말이 꽂혀 있었다. 파이프에서 물이 솟구쳐 올라 물살을 빠르게 한 여울을 지나며 문득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그 음악에 대해 평(評)한 베를리오즈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이와 같이 위대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지금 분석하고 연구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 내가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곡이 나에게 있어서 매우 위대함과 동시에 새로운 것이란 말뿐이다." 생상의 바이올린협주곡 3번에 대해 베를리오즈가 '매우 위대함과 동시에 새로운 것'이라고 한 말. 자연과 생태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맑은 물의 위대함이랄까. 불가능할 것 같았던 청계천의 재생은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물길처럼 자연스럽게 많은 작품을 써 내려간 생상(Saint-Saens, Camille 1835-1921)의 재능과 시정 넘친 멜로디를 떠오르게 했다.

나는 그 음악 2악장을 처음 들었을 때의 그윽함과 황홀한 매력을 잊을 수 없다. 그 음악과 만나기 위해 그동안 클래식을 좋아했던가. 왜 그때까지 그 음악을 몰랐었던가 한탄할 정도였다. 감미로운 선율과 찰랑거리는 듯한 리듬의 물결 위에 배를 타고 가는 듯한 기분이랄까. 나는 새로운 청계천의 감흥도 "이렇게 이룰 수 있는 건데 진작에 만들었더라면"하고 협주곡의 2악장을 처음 들었을 때의 경탄을 한동안 가졌다.

청계천에는 모전교에서부터 아래쪽 고산자교까지 22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강이 아닌 청계천 냇물은 고산자교를 지나 휘돌아 살곶이다리 밑을 거쳐 한강과 만난다고 한다.

생상은 그의 나이 44세에 바이올린협주곡 3번을 작곡하여 오늘날의 우리와 만나게 해주었다. 바이올린협주곡 2번을 쓴지 21년 후에야 쓴 신중한 곡으로 친구이던 스페인의 대 바이올리니스트인 사라사테에게 바쳤다. 청계천이 반가운 서울의 명물이듯이 그의 바이올린협주곡3번은 베를리오즈의 감탄처럼 반갑고 위대한 작품으로 '가장 프랑스적 화려함을 나타내고 있는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프랑스의 음악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시기에 근대예술의 기수로 참여하여 구노와 함께 새로운 부흥을 이루었다. 작곡가이면서 피아니스트, 지휘자, 화가, 시인으로 문학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떨친 프랑스의 자랑이기도 하다.

나의 1차 청계천 답사에서는 2만여 명의 시민들이 타일에 글과 그림을 넣어 장식한 '소망의 벽'까지는 못 가고 말았다. 최근 청계천 시점에서부터 한강 합류부 구간의 생물현황을 조사했더니 2백 여종의 동ㆍ식물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물억새 등 1백40종의 식물과 피라미, 버들치 등 물고기도 14종이나 되고 흰뺨 검둥오리 등 새 종류도 18종이 발견되었다. 곤충은 남방부전나비 등 41종이라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동ㆍ식물들은 청정한 물길로 되돌아온 것이리라. 우리는 향수나 귀소본능이 있으면서도 "뭇 새들도 깃 찾아 돌아오고 여기 우리 살며 느끼는 끝없는 기쁨이 있어라"는 도연명의 시구처럼 전원에 돌아가 소박한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가 않다. 그저 변화에 열심히 따라가노라 피곤할 때면 청계천에 가서 기다려온 것들을 만나며 기쁨을 누리며 위안을 얻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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