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신앙의 본질이자 축복

[ 논단 ] 주간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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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1월 25일(수) 00:00
채은하
목사ㆍ한일장신대 계약교수

   
채은하 / 목사ㆍ한일장신대 계약교수
지난해 9월,40여 명의 세계 기독교인들이 한 자리에 모인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담소하는 가운데 오늘날의 한국이 화제로 등장했다. 한 참석자가 내게 질문을 던져졌다. "그 가난하던 한국,전 세계의 동정과 원조로 살아가던 그 한국이 지금처럼 경이적인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나는 한국인의 근면성과 교육열을 꼽았다. 아무리 배고프고 가난해도,어떤 위기가 닥쳐도 교육에 대한 열정과 배워야 산다고 믿는 한국인의 기질을 소개했다. 뚜렷한 재원이나 자원이 없는 나라, 살기 위해 오직 교육에 매달리고 있다고 답했다.

그곳에 마침 유대인 여성 한 사람도 있었기에 "이스라엘도 마찬가지 아니냐"며 동의를 구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는 교육도 중요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사상 끊이지 않았던 안팎으로의 탄압과 억압, 곧 고난이 주된 이유라고 답했다. 유대인은 이스라엘의 존재 이후 생존이 늘 문제였는데 고난이 오히려 유대인들을 서로 단합하게 만들고 살아남게 했다고 말했다.

구약성경,그 어느 곳에서도 순탄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찾기 어렵다. 틈도 주지 않고 위협하는 강대국의 침입과 속박은 이스라엘의 존립을 늘 불안하게 했고 끝내 이스라엘인들을 디아스포라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게 했다. 때문에 유대인은 언제나 소수민족으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세계는 지금 유대인의 존재감이 어디서든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 우리에게 이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더욱이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한국 근대사의 고난과 함께 출발하고 성장해왔기에 이스라엘의 고난은 우리의 위로요 힘이 되었다. 고대 이스라엘의 생존은 곧 한국 기독교에 기쁨과 믿음과 미래의 표상이기도 했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군부독재로부터 이뤄낸 민주화와 경제 발전은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였다.

그 덕택인지(?) 한국 교회나 기독교인의 자만심과 우월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점점 축소되고 비어가는 서구 교회에 대해 냉소적 웃음을 보내고 있지는 않은가. 하지만 서구의 기독교도 지난 2천년 동안 팽창과 지배와 영광을 마음껏 누려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의 진정한 힘은 현재 누리고 있는 물질적 여유나 최첨단 과학,교회의 부흥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 동안 겪었던 고난과 민족의 아픔에 있다.

또한 우리나라를 품어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더듬으며 우리의 시선을 낮은 자리에 집중하는 데 있다. 과거의 고난과 오늘의 아픔을 잊어버리고 현재의 풍요에 안주하고 자만에 빠져버린다면 결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은 우리에게 이것을 분명히 증명해주고 있다.

오늘과 내일을 위해 우리는 지금까지 겪어온 고난과 그 의미에 대한 철저한 성찰을 동반해야 한다. 또한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세계의 고난과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겸허한 마음과 행동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그 고난과 아픔이 진정한 의미의 축복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현실은 무의미하고 파괴적이며 공허한 고통으로 바뀌고 말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고통은 그들을 존재하게 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하였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지만 부활보다 십자가를 앞세우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고난은 청산해야할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수시로 의식하고 살아야 할 우리의 근본이다. 지난 고난을 부끄러워하면 감춰야 할 수치요 단점이 되지만 드러내 놓고 그 의미를 찾으면 오늘과 내일을 위한 교훈이요 힘이 된다. 고난은 분명 축복의 열쇠이며 그 문을 여는 일은 순전히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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