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방일기>그해의 성탄절

[ 산방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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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20일(화) 00:00
   
장돈식

10월, 가을 타작이 끝났을 무렵이다. 파종은 대한민국 시절이었고, 수확은 인민정치 아래서 했다. 6.25전란이 일어난 그 해, 경기도 연백군의 한 시골에 학교를 세우고 정규학교에 진학할 기회를 놓쳤거나 읍내 학교가 멀어서 통학이 어려운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고 있던 때였다.

전선(戰線)은 일진일퇴(一進一退)인데, 평양에서는 교장, 교감을 파견하여 우리는 인민중학교 평교사가 되었다. 중학교라지만 고학년에는 이십대의 학생들도 있었다. 3학년 학생 신 군도 그랬다. 얼굴에는 주근깨가 많고 나이에 비해 앳되고 순박한 학생이나 언제나 수심어린 표정이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집안이 가난해서 그 마을의 지주(地主), 안(安)씨네 논을 소작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전 해에 이유 없이 신 군네가 경작하던 논을 떼여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고 했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쓰러져서 타계(他界)했다.

신 군이 며칠 안 보이더니 면(面)인민위원장, 즉 빨갱이가 되어 나타났다. 신 군은 수시로 인민재판을 열어 마을을 불안하게 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지주 안씨네 아들이 은신처에서 인민군 보안대원들에게 붙잡혀 왔다. 불안을 느낀 젊은 안씨는 어찌어찌 묶인 줄을 풀고 줄행랑을 친다. "저놈 잡아라" 쫓아가던 보안서원은 뒤에서 총을 쏘았다. 탈주자는 쓰러졌고, 추격자는 따라가서 총 끝의 단검으로 배를 가르고 간을 꺼냈다. 마을 주둔 공산당기관원들이 숙식하던 집의 아낙은 마당가 바지랑대에 걸려있는 것을 저들이 먹으려고 사온 고기인 줄 알고 부엌에서 썰다가 사람의 간(肝)인줄을 알고는 기절을 했고, 그날 이후 마을은 공포감에 휩싸였다. 그날 나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신 군을 만날 생각을 한 것이다. 놀란 가족과 교인들, 마을 어르신들이 말렸지만 뿌리치고 그의 집으로 갔다.

신 군은 사무실로 쓰는 자기 집에서 나를 맞았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겁내고 무서워하는데 선생님이 웬일이십니까?" 한다굨 조용히 할말이 있다고 하니, 5~6명 둘러서 있던 보안서원을 물린다. 나는 작은 라디오를 품에서 꺼내 건네주며, 남쪽 방송을 들으라고 했다. 공산군은 지금 쫓기고 있으며, 너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말을 했다. 다섯 달 동안을 저들 정치 아래 살아봤는데 몸 바칠 정치와 정부가 아님을 너에게 깨우쳐주기 위해 왔노라고도 했다. "몸소 오셔서 충고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마당까지 나와 전송을 한다. 가을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푸르다.

UN군이 인천상륙에 성공하였다. 기세등등하던 공산당은 많은 아픈 상처를 남기고 북으로 후퇴했다. 그해 성탄절에 읍동리교회를 찾은 '산타'는 평화를 선물로 가지고 찾아왔다. 그해의 성탄절은 감사와 감격의 눈물로 지켰다. 그 후로 나는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평화의 참 기쁨을 안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 날은 자정이 지났을 무렵, 대문이 아닌 뒷 창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다. 창문을 넘어 들어온 사람은 북으로 간줄만 알았던 신 군이었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초라한 모습이다. 시장한 듯 권하는 것을 먹고는 나의 손을 잡는다. 그동안 자기 집 근처 뒷산에 은신하고, 두 달 남짓을 숨어 지내며 언젠가 다시 내려올 인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어제부터 교회의 성탄절행사를 내려다보며, 저들은 저렇게 평화롭고 행복한데 나는 마을을 불안하게 만들 세력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니 비참한 생각이 들었고 자수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살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제가 저지른 죄를 아니까요. 저는 공산이념은 모릅니다. 다만 아버지의 원한을 갚겠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니 이제는 불쌍한 우리 어머니를 지켜드릴 수가 없게 된 것이 안타깝습니다.” 눈물이 사제(師弟) 두 사람이 마주 잡은 손등을 적신다. 나는 내일 우리치안대에 가서 구명(救命)을 힘써 보겠노라고 했고, "선생님, 헛수고일 뿐입니다"라며 떠났다굨

다음날 지서에서 전령이 왔다. 자수한 신 군은 총살판결을 받았는데, 마지막 소원을 물으니, "복음학교, 장선생을 보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서둘러 자전거를 타고 달려 지서에 다다르니, 성미 급한 치안대원들은 내가 당도하기 전에 방아쇠를 당겼다. 이미 절명한 신 군의 눈을 감겨주고 돌아섰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성탄절은 그날의 아픈 추억으로 가슴이 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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