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혜자의음악에세이>얼음과 불꽃의 '광시곡'

[ 음악에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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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14일(수) 00:00
유혜자

   
섣달이면 중요한 일을 맡고 있지 않으면서도 목표를 못 이룬 것 같고 속절없는 세월의 아쉬움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럴 때면 주저 없이 라흐마니노프(Rakhmanonov, Sergey 1873-1943)의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광시곡'을 듣는다. 몇 년 전 처음 이 곡을 택했을 때는 비감과 우수의 작곡가라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들으며 정면돌파 해나가기로 한 것이다. 이를테면 이열치열 법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빠른 템포로 호쾌하게 시작하는 것이 슬프기는커녕 속이 후련했다. 애초부터 가는 선율의 애달픔이 없다. 일격에 슬픔 같은 것은 몰아내려는 듯 강한 터치의 피아노와 쿵쾅거리는 오케스트라가 비애 같은 것은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한다. 이어서 화려한 피아노의 선율이 색채감 있게 연주되고 이 풍부한 피아노의 주 선율을 뒷받침해주는 관현악연주도 든든하다. 우수와 비감의 음악가라는 선입감으로 슬픔의 그림자를 찾으려던 마음을 접었다. 전설적인 파가니니의 음악을 주제로 했기 때문일까.

이 음악은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으로 연주한 '24개의 기상곡 a단조'의 주제를 모두 24번 변주하여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곡으로 만든 것이다. 슈만이나 리스트, 브람스도 이 주제로 변주곡을 만들었으나 라흐마니노프의 곡만큼 인기를 얻지는 못하고 있다.

빠르고 격렬하게 휘몰아치는가 하면 안일한 평화가 감지되기도 한다. 열 여덟 번째의 변주는 널리 알려진 서정적인 악장으로 그윽하고도 환상적이다. 변화무쌍한 곡 전체를 듣고 나면 대내외적으로 평탄치 않았던 한해의 일들이 떠오르고 개인적으로 누렸던 기쁨이나, 굴곡이 생각나게 된다.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첫 교향곡의 실패 후 신경쇠약으로 몇 년간 치료받고서 작곡한 피아노협주곡 2번이 유명한 글링카 상을 받으면서 재기했다. 그는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미국으로 망명해서 작곡보다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을 얻고 지휘도 하며 작곡의 뜻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떠나온 조국의 미래를 생각하며 망명동지들과 연방 반대서명운동에 참가하고 뉴욕 타임즈에 소비에트정책을 비난하는 글을 써 러시아에서 작품연주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 음악은 1934년 스위스의 경치 좋은 루체른 호반의 별장에서 한 달만에 이뤄낸 걸작으로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어려운 기교가 요구된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연주는 그 당시 비교대상이 없을 만큼 탁월하여 앙코르를 가장 많이 받는 연주자였다. 190센티미터가 넘는 키와 긴 팔로 뛰어난 기교를 발휘한 것이다.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광시곡'은 단순한 변주곡의 형태를 넘어 피아노와 관현악의 화려함과 색채감의 향연으로 불린다. 얼핏 24곡의 변주가 각기 다른 이질감으로 23분의 연주가 계속되기 때문에 쉬는 부분일 때 벌써 다 끝났는가 당황한다. 약동감이 드는가 하면 낭만적인 감흥을 일으키는 부분 등 끝났는가 하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지난 1년의 삶을 되돌아보면 평평한 길을 지나기도 했고 가파른 고개를 힘겹게 넘어오기도 했다. 이제는 어려움이 사라졌는가 하면 다시 이어지던 고달픔. 그러나 18번째의 변주에서는 꿈속을 거니는 환상을 갖게 된다.

그는 1935년, 망명18년만에 미국 시민권을 얻고 안정된 생활을 했다. 그런데 20년 동안 6개의 작품밖에 작곡하지 못한 회한은 없었을까. 18번째 변주의 그윽한 멜로디를 듣고 있으면 지난 시간의 아련한 향수가 느껴진다. 고국의 향수가 그의 마음 밑바닥에 깔렸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신선한 감각을 되찾을 변주곡을 꿈꾸기도 한다. 그러나 얼음과 불꽃이 어울리듯 순간적인 아찔함이 늘 곁에 있어도 감지하지 못하고 다가올 밝은 미래를 위해 노력한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위험이 비껴갔음을 나중에 알고 안도의 숨을 쉬기도 한다.

파가니니의 주제로 변주된 아름다운 명곡을 들으며, 우리 삶도 어느 절대자가 만들어놓은 주제를 제 나름대로 변주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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