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기념관, 그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며

[ 믿음으로떠나는여행 ] 믿음으로 떠나는 여행(28)-77인의 순교자들을 찾아서②

이수진 기자 sjlee@kidokongbo.com
2005년 11월 16일(수) 00:00
순교기념관에 들어가면,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터툴리안의 명언이 크게 적혀 있다. 그리고 벽에는 당시 순교 상황을 재현한 그림들이 차례로 걸려 있고, 그 아래로 순교당할 때 목에 매던 돌, 찔렀던 죽창, 당시 자료들이 잘 전시되어 있다.

   
염산교회 앞에 세워져 있는 순교 기념비.
순교기념관에서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당시 상황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죽음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떳떳하게 순교의 길을 택한 이들의 모습 속에서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사실 영광지역은 기독교인들이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지역 중에 하나라고 한다. 그 이유는 6ㆍ25 당시 영광군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 당시 영광은 전쟁에 대해 전혀 무방비 상태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6ㆍ25 이후 7월 23일까지도 라디오 방송에서는 남한이 전쟁에서 우세하다고 오보를 하고 있던 터라 마을 사람들은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다 7월 23일 갑작스럽게 몰려든 공산군들로부터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군수마저도 피난치 못하고 피살되었다고 하니 참담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염산에 진을 친 공산군들은 우선적으로 교회를 폐쇄하였다. 기독교인들은 공산군의 숙청 대상 1호였기에 기독교인들의 모임 자체를 없앤 것이다. 당시 오전 예배를 마치고 밤 집회를 알리는 종을 치러간 사모님은 끝내 종을 치지 못하고 울며 돌아갔다고 한다. 결국 교인들은 가정에서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피난을 거부한 김방호 목사가 성도들 집을 오고가며 비밀 예배를 집례하였다.

그러던 중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고 국군과 UN군이 영광 읍내로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마을에 퍼졌다. 이 소식은 숨어서 예배를 드려야 함을 탄복하고 있던 기독청년들에게는 커다란 희소식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익청년들과 더불어 만세 환영대회를 준비하고 이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 미처 후퇴하지 못했던 공산군들이 이를 분하게 여겨 이를 철저하게 보복하게 되면서 염산교회의 순교가 시작된 것이다.

우선적으로 10월 7일 만세 환영대회를 주도했던 청년들이 붙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주동자였던 염산교회 청년 기삼도가 교회당 앞에서 죽창에 찔려 첫 번째 순교를 당하게 되었다. 당시 목포 고등성경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기삼도는 목사가 되기를 소망하며 신앙생활에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23세의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부끄러움 없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의 죽음을 바라본 교인들은 오히려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다음날부터 공산군은 악에 받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붙잡힌 사람은 노병재 집사였다. 그들은 노 집사를 바닷가 수문 뚝방까지 끌고 가 수장시키려 했으나, 노 집사는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찬송을 부르며 순교하였다. 이후 노병재 집사의 부인 장일영 집사와 그 어머니 김식산 집사, 그리고 네 살 박이 막내 아들까지 9명이 순교를 당했다.

10월 13일에는 염산교회의 1대 교역자였던 허상 장로와 그 부인이 순교를 당했다. 공산군은 허 장로 부부를 봉덕산 골짜기로 끌고 와 매를 때리고 죽창으로 찔러 죽였지만, 순교를 당하는 허상 장로는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계속 designtimesp=18051>

박 귀 용 목사
/ 누가성지교육원 ㆍ안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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