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혜자의 음악에세이>유쾌한 오후

[ 음악에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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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1월 08일(화) 00:00
유혜자

"따아안 따따 딴 따따따-"

정오마다 황금빛 햇발처럼 퍼져오는 소리. 금관나팔의 힘찬 소리는 닫힌 유리창 밖의 공기를 가르며 교실 안에 있는 우리 귀와 가슴 구석구석에까지 빛나는 햇살을 들이댔다.

고교시절 'ㄷ'시의 문화원에서는 스피커로 시민들을 위한 방송을 했는데 시그널 음악이 트럼펫과 호른의 연주로 시작되는 경쾌한 행진곡풍의 음악이었다. 우리학교는 문화원에서 멀지 않았기에 소리가 가까웠다. 싫어하는 과목 시간이면 민망한 눈으로 서로 눈짓을 하며 끝나기를 고대하다가 들려오는 나팔소리는 10분 후에 끝난다는 구원의 신호였다. 그때도 저녁형 스타일이 많았던지 창틈으로 속살거리는 바람이 눈가를 스쳐와도 졸음을 쫓지 못하던 급우들이 나팔 소리에 정신을 되찾게 되었고, 아침을 굶고 온 아이들은 점심을 곧 먹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기도 했다. 저마다에게 희망의 소리였던 음악.

   
하루의 생활을 물에 비한다면 아침에 높은 산에서 급히 흘러 내려와 냇물을 지나고 강물까지 허위허위 흘러온 지점쯤이 정오가 아닐까. 나팔 소리가 나오던 그 음악은 바다가 보이는 지점에 이르렀다는 신호였다. 상류의 빠른 흐름처럼 바쁜 오전, 여러 곳에서 모여든 물들을 만나 함께 흐르기 시작하는 정오, 그것은 지향하던 너르고 너른 새 세상, 많은 생명이 꿈틀거리고 그리움이 있고 희망이 넘실대는 바다로 가는 출발점이기도 한 것이다.

성장해서 알게 된 그 음악은 주페(Suppe, Franz von 1819-1895)의 경쾌한 오페레타 '경기병(輕騎兵)'의 서곡이었다. 주페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함께 '빈 오페레타'를 확립한 공로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극장 지휘자였던 풍부한 경험을 살려 생애동안 무려 180여 곡에 이르는 오페레타와 극(劇)의 부수 음악을 작곡했다. 그 중 1866년, 47세에 초연한 오페레타 '경기병'은 빈의 시인 칼 고스타의 대본을 작곡한 것인데 그 내용은 헝가리 시골마을을 무대로 유쾌한 군인생활을 그린 것이다.

이 서곡은 극중의 주요한 선율을 모아서 만든 음악으로 경기병이 트럼펫과 호른을 힘차게 연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경기병의 갈로프 행진을 연상케 하는 경쾌한 선율로 바뀌고 화려하게 발전하는데 이내 어두워져서, 첼로가 우울한 기분 가운데 기도하는 듯한 선율을 연주한다. 그러나 마지막은 다시 용감한 행진곡이 나와서 화려하고 힘있게 끝난다. 밝고 힘찬 곡이어서 세계적으로 자주 연주되고 주페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버린 음악이다.

고교시절, 대학을 갓 졸업한 음악선생님이 귀한 음반을 구해와서 베토벤의 '운명'과 '합창'교향곡을 해설과 함께 들려주어서 감동을 받기도 했지만 우리는 매일 듣는 경기병 서곡에 정이 들어서 친숙했다.

아침에 불쾌했던 기분이나 수업 시간 긴장했던 감정을 풀리게 하고 극으로 치닫던 마음을 폭발하지 않도록 다스려주던 음악, 긴박한 경쟁사회에서 잠시나마 안정을 찾게 해주었다.

가족이나 이웃, 친척이 군에 갔다면 아마도 이 서곡 후반부에 나오는 애조 띤 첼로 합주 부분에선 힘들고 외로운 병영생활이 안타까워 눈물도 흘렸으리라. 그러나 앞 부분의 멋진 트럼펫 연주부분이나 경기병들이 목적지를 향해서 힘차게 달려가는 듯한 행진곡 부분에서는 경기병이 되고픈 생각도 들지 않았을까.

우리 소녀들에게 유쾌한 오후를 약속했던 경기병 서곡을 이따금 밤에 듣는다. 깊어가는 가을, 경기병들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이어서 조금은 애상적인 멜로디가 첼로로 이어질 때 적막한 밤의 초소에서 불침번을 선 병사의 외로움이 생각나기도 한다.

"만물은 허무에서 나와 무한을 향해 움직인다. 이 놀라운 행진에 누가 따라갈 수 있겠는가. 이 불가사의의 작자만이 그것을 알고 있다. 그 외의 다른 누구도 그것을 알 수 없다"고 파스칼이 '팡세'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어느새 행진곡풍으로 빨리 달릴 때 경쾌함보다는 허무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나이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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