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돈식의 산방일기>산방의 커피타임

[ 산방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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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0월 25일(화) 00:00
   
나는 커피를 즐기는 편이다. 집에는 우리 전통차(茶)가 있어 때로 마셔보기도 하지만 이미 '갈색황금'의 노예가 된지 오래다. 집에 있을 때면 마시는 장소는 정해져 있다. 산방을 스쳐 흐르는 개울가에 지은 정자, 초우정(草友亭)이다.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은 여기서, 추운 겨울 한 철은 서재에서 마신다. 시간도 정해져 있어, 매일 아침 9시경이다. 이 시간대에 차를 마시는 버릇은 아마 십 년도 더 되는 세월인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이웃에 사는 동생들도, 때로는 이 시간을 아는 문우(文友)와 친지들도 동참한다. 단골 참석의, 커피꾼들은 딱히 우리 차맛에 이끌려서라기 보다는, 장소와 그 분위기를 좋아해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한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제한된 사람끼리만의 세월이 지나다보니 당호(堂號)가 있음에도 우리는 그냥 '우리다방' 혹은 '정자다방'이라고 하기도 한다.

때로는 레귤러커피를 쓰기도 하지만 원두를 갈아서 내려 마신다. 커피가 자동으로 추출되는 '커피메이커'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수동으로 하는 것을 고집한다. 골동품 반열에 든 손으로 돌리는 분쇄기에 커피콩을 넣고, '아지직 아지직' 부숴지는 소리가 분위기를 자아낸다. 부순 가루를 깔때기에 여과지를 깔고 눈가늠, 손대중으로 내린다. 물은 전날 마신 커피의 무거리를 다시 한 번 내려서 그물로 새 커피를 만든다. 커피에 대해서 아는 척을 많이 하는 사람중에는 '커피 찌꺼기를 우려낸 물로 내리면 떫은맛이 생기고 향이 변질될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한번 거른 커피에선 구수한 맛이 우러나고, 새 커피에서 향이 나온다고 믿는다.

'커피를 바꾸는 것보다는 종교를 바꾸는 것이 더 쉽다'고 작가이자 커피 애호가인 조르주 쿠트린은 말한다. 그는 커피를 아는 사람인 것 같다. 커피가 지니는 그윽한 향과 쓴 맛, 은근한 신 맛을 잊지 못하니 차(茶)도 종교도 둘 다 바꾸기는 틀린 것 같다. 좀 깊이 있게 들어가면 커피의 종류가 다양함에 놀란다. 많은 물량이 나도는 브라질산은 맛의 특색이 없어 잘 쓰지 않는다. 아라피카계(系)는 좀 앙칼진 맛이 부담스럽고, 스마트라의 산(山), 불루마운틴은 산이 높아 항상 구름이 산 중턱에 끼어 있고, 그 위에 커피농장이 있다고 한다. 1년에 한번 수확한다는데 좋기로야 사계(斯界)에서 알아준다지만, 워낙 물량이 적으니 우리네 서민들의 몫이 있을 리 없다. 시중에 있다면 유사품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나는 중미(中美)의 과테말라나 컬럼비아 산(産)에 길들여져 있다.

꾼들이 모이면 화제(話題)도 다양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볼을 닮았다고도 한다. '인간복제가 완성되면 그 일을 가능케 한 줄기세포연구가 종교의 무덤이 될 거'라고도, '미셀 위라는 소녀골퍼가 그 어린 나이에 지금도 하루에 우리 돈으로 1억원을 번다'고도, 구한말에 나의 증조부가 종3품의 가선대부(嘉善大夫) 벼슬을 했다던 때의 얘기들이다.

이렇게 대화의 주제는 정해진 바가 없으니, 때론 통렬히 종교를 비판하고, 진한 농담으로 자지러지기도 한다. 단골 참석의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오늘은 무슨 이야기일까 그게 흥미로워서 온다고 한다.

많은 비로 개울물이 불어나면 정자엔 이미 물소리 이외엔 들리지 않는다. 소리를 질러 몇 마디, 서로 말을 건네 보지만 대화는 힘들다. 포말을 만들며 내 달리며 흐르는 물살을 지켜보거나, 물안개 피어오르는 냇물에 유유히 헤엄치는 흰 오리들을 바라보다 헤어진다. 단풍이 들면 꾼들은 말없이 '저런 빛깔의 말년(末年)을 살았으면'하고 그려보기도 하리라. 겨울이면 서재의 영창을 통해 앞산의 쌓인 눈을 바라보며 경치로는 연중 겨울이 가장 좋다고 상탄(賞嘆)한다.

자고나면 일과(日課)를 시분(時分)으로 쪼개어 일을 하며, 시망스럽게 살던 때가 있었다. 차나 마시며 무위(無爲)하게 시간을 죽이는 삶을 죄악시하던, 지난날의 나를 아는 사람이면, 지금의 나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지만 어쩌랴, 그 세월보다 오늘의 여유가 좋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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