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개가(凱歌)

[ 음악에세이 ] 유혜자의 음악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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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9월 13일(화) 00:00
유혜자

라디오PD시절 한가위 즈음엔 드보르작의 '신세계에서'와 베토벤의 '전원교향곡' 등을 선곡해서 들려주었다. 향수 어린 음악들이 그리운 얼굴들과 억새꽃 한들거리는 고향산천으로 달려가게 했지만, 소식 없는 이를 떠올리며 울음을 삼키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고향이 북쪽이거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고향에 갈 수 없는 이들의 눈물을 거두어줄 음악이 아쉽던 날도 있었다.

   
나는 요즈음 러시아의 작곡가 글링카(Glinka, Mikhail Ivanovich 1804-1857)의 밝고 힘찬 '루슬란과 루드밀라'의 서곡(序曲)을 들으면서 이 음악을 방송에서 한가위에 들려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한가위 때면 겨레의 명절, 많은 귀향 인파를 가리켜 민족의 대이동이라는 둥 '겨레와 민족'이라는 어휘를 자주 듣는다. 그래서 독일과 유럽 음악을 배우면서 국민음악을 쓰고 싶어 귀향했던 글링카를 생각하게 된다. 러시아 국민음악의 기초를 구축한 그의 음악 중 오페라 '루슬란과 루드밀라'의 서곡은 비교적 많이 알려진 음악이다. 원래 이 오페라는 러시아 민화에서 따온 푸슈킨의 같은 제목의 서사시를 극본으로 하고 민요를 반영한 총 5막 짜리 장대한 작품으로 국민 오페라를 만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형이어서 러시아에서나 공연될 정도인데 '서곡'만은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다. 글링카는 당시 국민들이 서양음악에 치중해서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에 국민적인 자각이 들어 러시아의 국민적인 소재로 민족성과 예술성을 결합한 장르를 구축하려고 애썼다.

한가위의 유래는 신라시대 여인들이 편을 갈라 길쌈솜씨를 겨뤄, 진 편이 회소곡(會蘇曲)을 부르며 음식을 나눠먹고 춤추고 놀았다는 것까지 올라갈 수 있다. 그후 시대가 바뀌고 국운이 기울어도 흥겨운 민족적인 대축제로 이어져 왔다. 외침의 수난과 외세의 식민지하에서도 면면이 전해져온 민족의 명절로 그해의 햇과일과, 햇곡식으로 빚은 송편을 조상에게 바치고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모여 풍요하게 해주심에 감사한다. 이 감사와 기원은 가족에서 민족으로 확대되어 화해와 은총을 기원했고, 남자들은 풍악, 여성들은 강강술래 등 공동 놀이로 민족의 응집력을 강화했다.

오죽하면 강강술래의 유래를 '강강수월래(强姜水越來)'라고 주장하게까지 됐을까. 임진왜란 때 산자락이나 먼 곳이 잘 보이는 높은 곳에서 놀이하던 부녀자들이 왜적이 강을 넘어왔다는 '강강수월래(强姜水越來)'로 신호를 보냈다는 것이다. 이 유래의 진위여부를 따지기보다 민족적인 놀이가 한가위에 행해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리라.

침략의 역사는 세계 어느 곳에도 있다. 서구의 여러 나라에서 승승장구한 나폴레옹이 1812년에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으나 지혜로운 러시아의 작전에 대패했다. 나폴레옹의 실패를 계기로 유럽의 나라들이 민족적 독립을 쟁취하기 시작했고, 억압받던 민족들에게 싹튼 민족의식이 음악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나폴레옹을 무너뜨렸다는 승리감이 민족적 자각으로 발전해 국민주의 음악이 태어나 세계로 전파되었다.

바로 러시아 국민음악의 기초를 구축한 장본인인 글링카. 그는 진보적인 작곡가로 "음악을 창조하는 것은 국민이요, 예술가는 그것을 편곡할 뿐이다"고 주장하며 후일 발라키레프, 보로딘, 무소르스키, 큐이, 림스키코르사코프 등 '러시아 5인조'를 탄생시킨 디딤돌이 되었다. 그가 개척한 국민주의 수법의 오페라, 가곡, 관현악 수법을 러시아 5인조들이 이어받아 러시아의 토양에 뿌리내렸고 나아가 세계적인 음악으로 확장시켰다. 헝가리의 리스트, 체코슬로바키아의 스메타나와 드보르작, 노르웨이의 그리그,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등에게 이어져 19세기 후반에 민족주의 음악이 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강강술래 놀이는 사라졌지만, 가족의 소중함과 만나는 기쁨, 풍요함에 대한 감사, 그리고 민족에 대한 축원은 이어지고 있는 한가위이다. 시대에 맞는 우리 민족의 개가가 될만한 음악이 아쉬워 러시아 민족혼이 담긴 글링카의 '루슬란과 루드밀라'서곡의 볼륨을 높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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