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그게 뭐 그리 대단하겠어요"

[ 아름다운세상 ] 공주원로원에 10억 기탁, 정혜옥권사 박경종집사 부부의 아름다운 노년

안홍철 기자 hcahn@kidokongbo.com
2005년 09월 09일(금) 00:00
미국의 대부호이자 오늘날 미국의 기부문화를 만들어낸 앤드루 카네기는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일은 자식이 최선을 다해 스스로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에 자식을 위한 일이 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죽은 후에도 부자인 사람은 부끄러운 일"이라고까지 말했다.

우리나라도 최근 들어 유산 안남기기 운동이 전개되고 있고 캠페인에 동참하는 이들도 증가추세지만 실제로 이뤄지는 경우는 극히 저조한 상태이다. 이런 가운데 평생 교편생활과 동요 작곡을 해온 80세의 할머니가 10억원을 본교단 공주원로원(원장:차기천)에 기탁해 화제가 되고있다.

   
정권사 부부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셨는데 참으로 난감하고 부끄럽다"며 "기왕 알려졌으니 많은 분들이 이런 일에 동참해주시면 좋겠다"고 수줍게 말했다.
"이제 다 산 인생인데…하나님이 언제 불러가실지 모르는데 돈이 뭐 그리 대단하겠어요?"

현재 공주원로원 아담스하우스에 입주해있는 정혜옥권사(영락교회)는 평생 교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부자일 수가 없지 않느냐며 "어려서 부모님께로부터 근검절약 정신을 배워 종이 한장도 여러번 돌아보고, 그저 월급 받으면 적금들고 퇴직금 보태고…그러다 보니 그런 돈이 생겼다"고 말하는 한편 "돈을 모을땐 재미가 있었는데 모이고 난 후에 오히려 어찌 써야할 지 몰라 근심이 생겼다"며 이번 쾌척에 대해 굳이 의미를 두지 않으려 했다.

정혜옥 권사. 나이는 80세, 평양에서 출생후 월남.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무용교육 전공)을 나와 경기대학교 보육교육과 주임교수를 역임했고 교육부 전신인 문교부 유치원 교육과정 심의위원을 지냈다. 문교부 장관상,서울특별시장상 교육부문,서울특별시 교육감상,대한유치원협회 공로상, 한국아동문학상 본상 등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평생 교편 생활을 했으니 대부분 상들이 이해가 가는데,마지막 이력에 한국아동문학상이 특이했다. 그런데 저서를 보니 궁금증이 풀렸다. 정권사는 16권의 저서를 냈는데 16권이 모두 어린이동요곡집, 어린이 음악과 무용집과 관련된 것 일색이다.

그 중에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동요 500곡집'. 10년 전 정권사 칠순을 기념해 출간된 이 책에는 현재 쉰이 넘은 이들은 기억할 동요들이 즐비하다.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내 몸과 내 동생 낳아주시고 사랑과 수고로 길러주시네…"('어머니'정혜옥 작사 작곡) "예배 시간에 조용히 헌금시간엔 정성껏 힘든 일도 내가 먼저 우리들은 예쁜 아이, 아무거나 잘먹고 하기싫은 일도 내가 먼저 어려울 때 잘참는 나는 나는 착한 아이"('참을수 있어요'박경종 작사 정혜옥 작곡) 등등 교과서에 실린 것 뿐 아니라 교회학교 찬양곡도 다수 수록돼 있는데 특별히 5백곡 중에 3백여 곡이 '박경종 작사 정혜옥 작곡'으로 돼 있어 질문을 하니 정권사는 빙그레 웃으며 '남편'이라고 답한다.

잠시 후 만난 남편 박경종 집사(영락교회ㆍ90세)는 휠체어에 앉은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인사를 해도 무표정, 기자가 무안한 얼굴을 하자 정권사가 "귀가 어두운데다가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어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큰 소리로 다시 인사를 하니 목례를 한다. 박집사가 나타나자 정권사는 '박선생님'이라고 남편을 부른다. 만나서 결혼한지 반세기가 흘렀건만 정권사는 남편을 '존경한다'고 말한다. "어떤 분이기에?" 궁금해하는 기자의 표정을 본 정권사는 단지 "저보다 더 근면성실한 분"이라고 짧게 대답하며 사랑스런 눈으로 남편을 바라본다. 두 사람이 만난 이야기가 드라마틱했다. 50년 전 KBS 라디오에서 어린이 동요 작사작곡 공모를 했는데 정권사의 곡과 박집사의 시가 뽑혀 '꼬꼬놀이'라는 곡으로 탄생했다. 지금의 '뽀뽀뽀'같은 류의 당시 어린이 프로그램 오프닝 시그널 곡으로 채택된 이 노래는 프로그램 제목도 '꼬꼬놀이'로 할만큼 인기있는 곡이었다고. 결국 이것이 인연이 돼 두 사람은 평생 함께 살게됐다.

"컴퓨터로 돈 번 사람, 거 이름이 뭐드라…그래,빌 게이츤가 하는 사람이 지난 해 미국 상속세 폐지 법안에 대해 반대운동을 했다는 이야기가 참 감동이었죠. 어떻게든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상속세를 피하려고 갖은 방법을 다 쓰는 우리나라 부자들하곤 참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귀가 잘 안들려 인터뷰 내내 대화가 힘들긴 했지만 90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박집사는 생각이 맑고 투명했다. 듣고보니 박집사의 이력은 정권사보다 더 대단했다. 한국문인협회 이사,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협회장,크리스찬문학가협회장 등을 역임했고 한국 PEN문학상,대한민국 문학상,반달 동요대상,KBS 동요대상,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저서가 17권의 동시집에 23권의 동화집 등 40권이나 되니 대표작은 셀 수 없이 많을텐데 그 중 '초록 바다'와 '눈' 등이 기자의 눈에 들어왔다.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파아란 초록빛 물이 들지요 초록빛 예쁜 손이 되지요 초록빛 여울물에 두 발을 담그면 물결이 살랑 살랑 어루만져요 우리 순이 손처럼 간지럼 줘요" (초록바다)

"흰눈이 보슬보슬 내려옵니다 고향에서 낯익은 새하얀 눈이 산에도 들에도 지붕위에도 소리없이 보슬보슬 내려옵니다 소리없이 보슬보슬 내리는 눈은 그리워서 기다리던 고향집 소식 반가워 두 손 벌려 받아봤더니 눈물만 방울방울 짓고 있어요" (눈)

원장 차기천 목사는 두 사람은 공주 원로원이 개소하던 96년에 입주한 이래 지금까지 가장 든든한 '빽'(배경)이라고 두 부부를 소개한다. "원로원 자체 행사가 있을 때나 주변 시설을 개조할 때 등 원로원 내 크고 작은 일에 쌈짓돈을 내놓는 분들"이라고 밝히는 차목사는 "물질 뿐 아니라 입주자들에게 무더운 날 커다란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처럼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차 목사는 "월남하신 분들은 부부라 하더라도 각기 독립된 재산을 가지고 있는 '따로국밥'인 경우가 많다"며 "이번 10억원 쾌척은 정권사 개인 재산이라 박집사와 상의하진 않았지만 박집사도 '참 잘한 일'이라 격려해줬다"고 전한다.

정 권사는 공주원로원에 입주해서 "총회가,또 장로교복지재단이 참 큰 일을 하고 있단 생각을 했다"며 "1991년에 도림교회 이만영장로님이 1억원을 내시고 94년에 영락교회 홍복섭권사가 공주 땅 5천평을 기증해서 오늘날 공주원로원의 초석이 됐다는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았고 저도 이런 결심을 하게된 것"이라 말했다. 정권사는 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셨는데 참으로 난감하고 부끄럽다"며 "기왕 알려졌으니 많은 분들이 이런 일에 동참해주시면 좋겠다"고 수줍게 말했다.

남편은 귀가 어둡고 당뇨로 인한 시각 장애로 고생하는 상황 속에서도 두 부부는 참 금슬이 좋아보였다. 인터뷰 내내 동문서답 형식의 대화가 오갔지만 아내의 동요에 시를 쓰고,남편의 동시에 곡을 달며 반세기를 함께 살아온 두 사람은 정말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평생 동요를 쓰며 어린아이처럼 살고있는 노부부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기자의 마음은 풍성한 가을들녁처럼 가슴 가득 감동이 밀려왔다.

안홍철 hcahn@kidokong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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