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방일기]화재시말서

[ 산방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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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7월 07일(목) 00:00

장돈식

   
나의 서재인 산방에 불이 났다. 저녁 8시 경 이웃 집에 갔다가 9시 TV 뉴스를 보려고 돌아와 현관에 들어서는데 집안에 연기가 자욱하다.'불이다!' 직감하고 소화기(消火器)를 켜들고 안으로 두 세 걸음 들어가다가 후퇴한다. 연기가 어찌나 독한지 두 세 호흡했을 뿐인데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부엌 천정 언저리에 불꽃이 보인다. 119에 신고를 하고, 마당에 세워둔 차를 멀리 뺐다. 소방차의 진입에 장애를 줄까봐서다. 묶어 기르는 개들을 풀어준다. 불길이 맹렬하게 지붕위로 치솟으며 집 전체가 화염에 휩싸인다. '이럴 수가!' 나의 모든 것은 저 불속에 있다. 뜬금없이 어릴적의 놀이가 떠오른다. "두껍아, 두껍아 새 집 줄께 헌 집 다오" 동동 구르는 동안 소방차가 열 대는 왔다. 그리고 연신 물을 뿌려댄다. 구경으로야 싸움구경이 좋고, 홍수(洪水)가 구경거리라지만, 불구경이 으뜸이리라. 멀리서 가까이서 마을사람들, 보도기관의 기자들, 경찰관, 반장, 이장, 이웃들이 모여들었다. '끌끌' 혀를 차며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하지만 들릴 리 없다. 이상한 것은 소화(消火) 작업을 하던 대원들이 작업을 중단한 듯 뒷짐지고 둘러서서 구경만 하는거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 이런 목조(木造)집에 스티로폴 단열을 한 집은 소화가 불가능하고, 다만 연소(延燒)를 막을 뿐이라고 했다. 잔불 진화를 끝낸 소방대원들도 돌아갔다. 아직 열기가 있는 잿더미에서 무럭무럭 오르는 김이 올라가는 밤하늘에는 별만 종종하고, 애써 가꾸던 집 둘레의 나무들의 새까맣게 탄 몰골이 불쌍하다. 밤은 자정을 지나는데 갈 곳도 쉴 곳도 잘 곳도 없다.

근처 호텔을 찾아갔다.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집이 탔다는 말은 내 몸의 일부도 탔다는 말임을 알 것 같다. 반평생 손때 묻은 그것들, 컴퓨터는 나의 두뇌의 일부였고, 입어서 편하던 옷가지들은 내 피부였다. 이런저런 증명서들, 여권, 인감도장, 통장들은 다시 만들면 된다지만 책을 한권 더 낸다고 원고를 정리 저장한 컴퓨터와 디스켓은 흔적도 없다.

이튿날이다. 적십자(赤十字)사의 구호품 보따리가 왔다. 놀라운 것은 그 신속함과 이재민(罹災民)이 한 달은 살 생활용품이 식량, 침구, 심지어 이쑤시개까지 완벽하다. 앞으로는 적십자 회비를 낼 달에는 찾아가서 고지서를 달라고 해서 낼 생각이다. 다음은 마을의 이장, 반장, 유지 분들이 가져 온 식량, 침구 등도 유용했다. 가톨릭 본부의 봉사단도 구호품을 보내왔다. 저들은 모든 것을 소실한 이재민의 아쉬움을 덜어 줄만큼을 베풀었다. 원주 시내에는 개신교계의 교회가 5백이요, 연합조직도 있다고 한다. 내가 평생 몸담아 온 교회를 포함해서 교계에서는 아무런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괜찮다. 그러나 교회가 구호기관은 아니라지만, 착한 사마리아인만큼은 바라지도 않지만, 교회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막막하던 중에 소식을 들은 제주의 문우에게서 소식이 왔다. 나의 글들이 자기의 컴퓨터에 있다는 것이다. 지난 겨울 지병인 고혈압을 달래기 위해 제주도로 피한(避寒)을 했었다. 거기서 내 글을 좋아한다는 그 후배 문우에게 복사해 가도록 했던 기억이 있다. 만사(萬事)물리고 가서 아직 발표하지 않았던 상당히 많은 양의 글들을 다시 옮겨올 수 있었다. 문득 이미 하세(下世)하신 나의 은사 정경옥 교수의 묘비명(墓碑銘)이 떠오른다. '내가 소유했던 것은 다 두고 가고, 남에게 베풀었던 것은 가지고 가노라'

이번 일로 내가 매우 가슴 아픈 일이 또 있다. 내 집을 떠나지 않고, 십 여 년을 동거해 온 딱새네 가족의 불행이다. 올해는 지하실 출입구 벽 위에다 둥지를 틀었었다. 알 네 개를 낳고 포란(抱卵)을 하다가 수컷은 화재를 피했으나 암컷은 끝까지 새끼를 품고 있다가 피하지 못하고 타죽었다. 사람들은 봄철 산비둘기의 우는 소리를 '계집 죽고, 자식 죽고, 망건 팔아 널(棺)사 묻고'라고 운다고 했다. 우리 집 딱새야말로 산비둘기의 푸념처럼 되었다.

깨달음도 있었다. 보도(報道)로만 듣고 보던 재난이 내게도 있을 수 있다는 것, 이웃의 경사(慶事)를 같이하는 것도 좋지만 흉사(凶事)에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것, 자연을 사랑한다고, 딱새니 다람쥐의 가족을 끼고돌다 저들에게 멸문의 화(禍)를 안겨준 게 가책으로 마음에 와 닿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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