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에 생각나는 사람들

[ 산방일기 ] 장돈식의 산방일기(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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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6월 21일(화) 00:00
장돈식

6월 25일이 다가오니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앞산에 오르면 서해가 바라보이는 황해도 장연군 후남면은 대대로 살아온 내 고향이고 할머니 때부터 섬기는 장주애교회가 있다. 공교롭게도 원한의 38선이 우리 마을 4킬로미터 앞을 지나 있었다. 날짜는 잊었지만 1946년 가을 어느 날, 장연읍 내 서부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박경구 목사님이 한 젊은이를 데리고 우리 집에 오셨다. 평소에 존경하던 목사님은 당시 서해지역 교회의 시찰장으로 이름 높은 어른이다. 방에 모시고 주위가 조용해지자 좀 어려운 부탁이 있노라고 한다. 데리고 온 젊은이는 당신의 아들이며 이남으로 보내어 공부를 시키고 싶다는 것이다. 좀 위험한 일이기는 하지만 갯가에서 배를 부리는 허집사와 일을 꾸며 웅진반도를 거쳐 무사히 월남할 수 있도록 도와드렸다. 그 젊은이가 바로 후일 장로회신학대학교 학장을 지낸 박창환 박사다.

그 날밤 목사님 부자(父子)는 우리 집에서 묵게 되었는데, '목사님도 하루빨리 가족과 함께 남하(南下)하시면 책임지고 도와드리겠노라' 간곡히 권면을 하였으나, 목회자로서 양떼를 두고 혼자갈 수 없노라고 한다. 일제(日帝)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일본경찰에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는데 해방이 되자 이번엔 공산당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다.

북한 공산당은 우리들 예수 믿는 사람을 제일의 공적(公敵)으로 생각한다. 그 박해를 견딜 수 없어 우리가족 대부분이 월남을 했고, 그 후 한국전쟁이 터져 국군이 남으로 밀리다가 잠깐 9.28 수복으로 잠시 고향에 들릴 수가 있었다. 후퇴하는 공산군은 지식인과 종교인들을 참혹하게 살상한 뒤였다. 박목사님도 정치보위부에 잡혀가 교역자와 신도들이 어디에 숨었는지 대라며 고문을 당했다. 토굴에서 찾아낸 목사님의 시체는 손가락, 발가락이 없었다. 다그칠 때 하나씩 잘라 버린것이다.

같은 군 내 태탄교회에 시무하시던 박성겸 목사님도 그 때 순교하신 분이다. 저들의 후퇴 말기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는데 목사님이 입었던 Y셔츠를 찢어 입에다 쑤셔 넣어 죽였다. 그 천이 목을 지나 가슴까지 박혀 있었다고 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던 무리가 마음이 찔려 귀를 막고 돌로 쳤다는데 공산당도 그 마음이 찔렸던지 입을 막아서 죽인 것이다. 박목사님이 죽음에 임박해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을까. 설교의 내용이 전해지지 못했음이 안타깝다.

같은 군 내인 모감면, 은행정 교회를 목회 하셨던 김용구 목사님은 그 마을 빨갱이들이 끌어다가 죽였다. 그들은 총검으로 마구 찌르고는 죽은 줄 알고 구덩이에다 버리고 갔다. 국군이 진격한 후 시체를 찾던 가족과 교인들이 발견했을 때는 아직 숨결이 느껴졌다. 모셔다가 치료를 했으나 수일 후 돌아가셨다. 의식을 회복했을 때, 끌고 가서 당신을 찌른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어도 '알 필요 없다'고 끝내 밝히지 않고 운명하셨다. 당시의 흥분한 사람들의 살벌한 분위기로 보아 가해자를 알면 보복살생이 또 있을 것을 염려하신 것이다. 자신을 괴롭힌 바 없건만 죽이는 자와, 자신을 죽인 자를 밝히지 않는 김목사님,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고향의 우리 장주애 교회의 정태진 전도사도 순교한 교역자다. 리가 월남한 뒤에 부임하셨기 때문에 상면(相面)한 적은 없는 분이다. 9.28수복이 된 뒤 우리가 갔을 때에는 이미 죽임을 당한 뒤였다. 경황없는 가운데서도 교회는 추수감사절을 지켰고, 그 때에 모아진 식량과 얼마간의 돈을 가족에게 드렸다. 홀로 된 30대의 젊은 사모가 어린 것들을 안고, 가지고 왔던 약간의 살림살이를 소달구지에 싣고 당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모는 울며울며 에누다리(달구지를 타고 가는 것)를 한다. "둘이서 왔다가 나 혼자 갑니다. 온 마을이 공산당 물러가 살기 좋은 세상 되었다고 만세를 부르는데, 내 이 분하고 원통한 마음은 하나님만 아십니다." 비포장 자갈길에 덜거덕거리는 우차(牛車)를 부여잡고 동구 밖까지 같이 따라가며 울던 여인들, 그날 따라 희끗 희끗 눈발이 날렸다.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멍청이 서서 바라보던 때의 그 아픔, 이 드라마의 연출자가 하나님이신 걸 어떻게 믿어야 하나. 그 갈등은 오래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뒤 남하(南下)하지 못한 고향 장주애교회의 교우들, 지금 몇 분이나 살아서 어떻게들 지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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