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칼럼>'자유와 똘레랑스'

[ 논설위원 칼럼 ] "교회의 똘레랑스, 말씀의 종되어 섬길 때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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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6월 01일(수) 00:00

   
차종순/호남신대 총장
홍세화씨는 '파리의 운전사'라는 책에서 프랑스와 대한민국 사회의 큰 차이점을 똘레랑스(tolerans:tolerance) 개념을 통해 제시했다.

자신의 몫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이 몫을 충실하게 해냄으로써 다른 사람이 하는 몫을 간섭하지 않으며, 자신의 사상이나 주의를 강요하기보다는 논리를 통하여 설득하려 하고, 사상이 다르다고 해서 미워하지 않고 또한 자기와 같은 사상을 가지라고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똘레랑스이고 자유이다.

이 개념을 통해 평등사회가 이루어지고, '다양성의 조화', 개체를 위한 전체와 전체를 위한 개체(pars pro toto, totus pro parte)가 이루어진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에게는 자신들의 몫에 충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이에 동조하는 잘못, 그리고 한계를 뛰어넘는 잘못이 있었다.

에덴동산의 경우에 똘레랑스는 한계 내에 머무를 때에 정의(just)이고 적법(lawful)이지만 한계를 넘어서면 불의(unjust)이고 불법(unlawful)이다.

이 개념은 동시에 종교개혁의 정신이기도 하다. 교회의 머리인 교황의 지시에 대한 절대 복종으로 이어지던 중세의 제도를 거부하고 만인 제사장 직능을 말하였던 것은 '똘레랑스'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개혁교회는 각 교회가 나름대로의 자유로운 똘레랑스를 가지지만, 그것은 목회자가 중세의 교황이 되지 않고 말씀의 종(minister)이 되고, 교회와 교인들을 섬기는 자(minister)가 될 때에 가능하다.

오늘날 대형교회들에서 터져 나오는 불미스러운 현상은 중세의 교황제와 유사한 전횡의 결과이다. 목회자가 중세의 교황처럼 전횡을 행사한 것도 문제이고, 그러한 목회자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여 나름대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다가 이제 힘이 없어진 상황에서 지나간 시절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문제이다. 이것은 개혁의 정신이 아닐 뿐 아니라, 개혁이라 할 수도 없다. 개혁은 "지금 여기에서"(nunc et hic) 이루어져야 한다.

시간을 놓친 다음에 개혁을 부르짖는 것은 똘레랑스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며, 개혁에서 절대적인 용기를 간과하는 것과 같다.

똘레랑스는 자신이 맡은 몫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한계를 넘지 않아야 하고, 자신의 몫을 1백 퍼센트 충실하게 이행함으로써 전체의 조화를 이루는 데서 실현될 수 있다.

특히 요즈음 한국교회 지도자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몫을 감당하기 위해서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일"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희랍어 성경 원문을 보면 곧 성실하게 일하면서도 자신을 "상하게(πωπισζω)" 하는 일(고전 9:27)이 있어야 하며, 라틴어 성경에서는 "인두로 지지는 괴로운 일"(castigo)로 번역한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차종순/호남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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